[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사리의 조르지뉴 사랑은 계속

입력 2019-02-12 12:00 수정 2019-02-12 12:00
조르지뉴.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것이 결과로 대변되는 축구에서 소신과 아집은 종이 한 끗 차다. 계속된 고집이 성공으로 연결된다면 철학이 되고, 이미 성공한 바 있는 전술 운용 시스템이 반복돼 패배로 이어진다면 유연성 부족과 고집이 된다. 마우리시오 사리 첼시 감독의 조르지뉴 사랑은 후자의 경우다.

같은 패를 계속 꺼내 들 수는 없는 법. 시즌 초 우승경쟁을 거듭했던 사리볼에 대한 약점은 명확해졌다. 중원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는 조르지뉴를 봉쇄하는 것이다.

첼시는 11일(한국시간) 새벽 상대 안방에서 펼쳐진 맨체스터 시티와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26라운드 경기에서 0대 6으로 패했다. 그야말로 참패였다. 전반 25분 만에 4골을 내줬을 정도로 수비적인 조직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첼시가 받은 상처는 대패의 결과뿐만이 아니었다. 시즌 초 우승경쟁까지 하던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에 뒤처진 6위까지 순위가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은 장담할 수 없다.

사리 감독을 향한 위기도 가중됐다는 분석이다. 최근 첼시는 주축 에당 아자르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설과 선수단의 태업설, 사리 감독의 리더십 결여 등 그라운드 안팎에서 논란이 뜨겁다.

첼시는 지난달 28일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잉글랜드 FA컵에서 3대 0 승리를 거뒀다. 들쭉날쭉한 롤러코스터의 출발점이었다. 곧바로 3일 후 본머스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4대 0 대패를 거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난 3일엔 리그 최하위에 있는 허더즈필드 타운을 5대 0으로 꺾었다. 신입생 곤잘로 이과인이 데뷔 골을 터뜨리는 등 추후 반전을 기대했지만 이러한 꿈은 맨시티의 폭격 아래 무참히 깨졌다.

조르지뉴(오른쪽)가 11일(한국시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상대 공격수 세르히오 아구에로(왼쪽)을 막아서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짧았던 조르지뉴 시대

시즌 초 첼시는 리버풀, 맨시티와 함께 무패행진을 달리며 막강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사리 감독 부임 이후 모든 대회 포함해 18경기 동안 패배가 없었다. 첼시의 상승세를 이끌었던 핵심은 단연 조르지뉴였다.

사리 감독이 첼시 지휘봉을 잡고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조르지뉴 영입이었다. 이전 소속팀이었던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의 나폴리에서 함께 했던 인연 때문이다. 사리 감독과 조르지뉴는 나폴리에서 ‘사리볼’이라 불리는 사리 감독만의 축구 철학을 구현하며 성공시대를 함께 했다. 사리볼은 짧은 패스를 통해 많은 볼 소유를 하고 수비 시에는 높은 라인부터 강한 전방 압박을 구사하는 사리 감독 특유의 축구 시스템을 뜻한다

비록 절대 강자 유벤투스에 밀려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선수단에 막대한 투자를 꺼리는 나폴리 운영 방침상 그들의 성적은 가히 대성공이라고 할 만했다. 무엇보다 그라운드에서 펼쳐진 그들의 아름다운 축구는 결과 이외의 즐거움을 주며 팬들의 많은 찬사를 받았다. 사리볼의 중심은 단연 조르지뉴였다.

사리는 자신의 애제자인 조르지뉴를 곧바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적응기도 필요 없었다. 나폴리에서 수행했던 역할 그대로 맡았기 때문이다. 추구하는 팀 스타일도, 감독의 지시사항도 같았다. 이적 직후 곧바로 첼시 선수단에서 가장 높은 패스 성공률을 기록하며 팀의 모든 공격 전개에 가담했다.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에서 페널티킥 키커로 나섰을 정도로 첼시에서 그의 입지는 대단했다. 사리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 스타일을 다른 선수단에 조언도 해주며 선수단과 감독 사이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신입생이지만 고참과 다를 바 없었다.

첼시가 그동안 주축 선수들과 감독들의 불화설이 끊이질 않았던 점을 생각했을 때 이 점에서 조르지뉴는 선수단과 사리 감독과의 중간다리 역할도 해줄 수 있다는 기대도 모았다. 조르지뉴의 활약으로 후방 빌드업과 수비 안정 모두 갖추게 된 첼시의 공격력은 더욱 매서워졌다.

무엇보다 조르지뉴가 첼시에서 가지고 있었던 가치는 첼시를 완벽히 다른 팀으로 변모시켰다는 데 있었다. 첼시는 전임 감독인 주제 무리뉴와 안토니오 콘테를 거치며 내려앉는 수비 지향적인 축구에 익숙했던 팀이다. 콘테 감독 지휘 아래 특유의 스리백을 펼치며 짧게나마 유럽축구를 풍미하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에 스리백 열풍이 불었을 정도다. 이러한 스리백을 공격 중심의 포백으로 변화시키는 데 조르지뉴의 역할이 막중했다.

조르지뉴의 첫 번째 역할을 공격 상황에서 계속해서 간격을 좁게 유지하는 것이다. 공격권이 넘어간 상황에서 하프라인을 넘어가 강하게 전방압박을 해야 한다. 이전 감독들과 달리 사리 체제에서는 전방에서부터 압박하는 수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중원의 비중이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비록 탈압박 능력에 약하고 발이 느리다는 약점도 있었지만 조르지뉴가 가지고 있는 넓은 시야와 빠른 패스, 뛰어난 기술력은 이러한 단점을 커버하기 충분했다. 조르지뉴가 4명의 수비라인 바로 윗선에서 볼을 전방으로 배달해주는 역할을 맡으며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은골로 캉테는 자연스레 전술적 이유로 희생됐다. 캉테는 조르지뉴 합류 이후 전진 배치돼 중앙 미드필더로서의 활동 영역이 훨씬 제한됐다.

사리볼의 성공기는 이탈리아를 넘어 잉글랜드까지 잠식하는 듯했다. 하지만 곧바로 약점이 노출됐다. 공교롭게도 첼시가 경기력 기복을 겪으며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과 조르지뉴가 부진을 겪었던 시기는 비슷하다. 상대 팀들이 첼시의 경기 리듬에 노출됐고, 조르지뉴의 약점이 발목을 잡았다는 뜻이다.

사리볼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전술적 다변화가 부족하다는 점 역시 크게 한몫했지만, 핵심은 조르지뉴 봉쇄와 캉테와의 공간 사이를 공략하는 것, 조르지뉴와 첼시 센터백의 이차적인 전진을 늦추는 것이다. 조르지뉴를 상대로 전문적인 일대일 대인방어에 성공한다면 첼시의 공격전개는 곧바로 문제가 생긴다. 약점이 분명한 만큼 조르지뉴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전방 압박은 엔진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엔진에 문제가 생기다 보니 곧바로 기계는 오작동을 일으켰다.

마우리시오 사리 첼시 감독이 11일(한국시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좌절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캉테와 코바시치의 활용

전술적인 유연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캉테와 마테오 코바시치의 적극적인 활용이다. 이번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새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코바시치는 아직 프리미어리그에서 풀타임 누벼본 적이 없다. 조르지뉴의 원 볼란치와 캉테의 위치는 사실상 고정이다. 로스 바클리와 함께 주로 백업 요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리 감독이 원 볼란치에 대한 고집만 버린다면 코바시치의 보다 폭넓은 활용이 가능하다. 코바시치는 조르지뉴보다 좀 더 높은 지점을 점유할 수 있다. 현재 아자르와 캉테가 각 하프 스페이스 지역을 담당하고 있지만, 아자르는 상대의 수비 범위 밖에서 중앙으로 들어오는 공격적 변형이나 포지션 스위칭 플레이에 능한 선수다. 아자르의 공격적 파괴력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조르지뉴 보다 전진해서 광범위하게 커버할 수 있는 코바시치의 능력을 보다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사리 감독은 몇 차례 조르지뉴와 코바시치의 더블 볼란치를 들고 나온적 있었고, 당시 결과와 경기력 모두 나쁘지 않았다.

은골로 캉테가 11일(한국시간) 맨체스터 시티와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올렉산드로 진첸코를 피해 볼을 몰고 전진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캉테를 중심으로 한 빈도 높은 연계의 회귀도 하나의 대안이다. 캉테의 수비라인 보호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지난해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프랑스 수비진들은 그다지 주력에 강점이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캉테가 특유의 활동량을 바탕으로 많은 커버 범위를 소화했기에 훌륭한 수비가 가능했다.

콘테 감독의 스리백 시스템에서도 그랬다. 마르코스 알론소와 같은 좌우로 넓게 벌린 양 윙백과의 시너지도 훌륭했다. 하지만 조르지뉴 위치 탓에 사리볼에선 보다 전진해 오른쪽으로 위치가 제한됐다.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공격적으로 변화한 캉테의 성장은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지만, 종전 미드필더를 강력하게 홀딩 했던 캉테의 역할은 부진한 첼시의 반전 요소가 될 수 있다.

물론 현재 첼시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조르지뉴에게만 묻기엔 가혹한 측면이 있다. 조르지뉴가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가 부진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중앙으로 좁혀 들어오는 아자르를 통제하기 위해 상대가 중앙 지향적으로 수비라인을 올리면 자연스레 최후방 뒷공간에 대한 불안함이 남게 된다.

조르지뉴가 종종 라인 사이에 있는 스트라이커들에게 위협적인 패스를 전개하더라도 상대 센터백들이 효과적으로 그들을 통제하며 아자르에 대한 세컨드 볼 연계 상황도 나오지 못했다. 조르지뉴와 최전방 사이의 간결한 연계가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이제 남은 것은 사리 감독의 선택만이 남았다. 캉테와 조르지뉴를 중심으로 한 2선 중원의 기용을 두고 선수단 간 불화가 생겼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자리를 찾기 위해 팀을 떠났다. 이러한 이유로 다수의 현지 언론들은 사리 감독이 지금과 같은 전술을 고집할 시 선수단 태업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를 내비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리 감독이 추후 어떤 카드를 들고나올지가 관심사다.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사리의 조르지뉴 총애는 계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사리볼의 철학에서 조르지뉴의 전술적 효용도는 아직까진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캉테를 과거 콘테 감독 때와 같은 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사리볼의 포기를 의미한다. 수비적인 역할에 강점이 있는 캉테와 빌드업 중심의 조르지뉴의 직접적인 포지션 비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리 감독은 지금쯤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조르지뉴 사랑에서 벗어나 2선 중원에서 더욱 유연성을 가져가야 한다는 점이다.

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 전광판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태화 기자가 함성소리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전하는 스포츠 연재입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