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을 쭉 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있는 것 같아요. 출판도 예술이고, 작품이거든요”
△돈 안 되는 연극서적을 고집스럽게 출판하는 도서출판 ‘연극과 인간’ 박성복 대표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제55회 ‘동아연극상’ 특별상 수상자는 도서출판 ‘연극과 인간’ 박성복(65)대표였다. 허순자 교수(서울예대)는 “돈 안 되는 연극서적을 고집스럽게 출판해 온신 분”으로 기억했다. 박 대표는 “연극인들과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특별상으로 연극판에 뛰어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고 말해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책을 팔아 이윤을 만들기 보다는 사람을 남긴다’ 는 경영철학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읽힐 만한 책을 발견해 내는 탁월한 안목도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책 세일즈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고, 30대에 출판사 사장이 됐다. 많이 안 팔려도 독자가 언젠가는 찾는다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작은 이익은 철저하게 경계했고 팔린 만큼 인세를 지불했다. 책과 저자를 세상에 알린다는 마음은 인생철학이 됐다. “적자는 아니지만 남는 사업은 아니죠. 연극서적으로 가치가 있는 책들은 출판 합니다. 파주에서 찍는데, 한권 출판하면 인쇄비도 많이 들지요. 그렇다고 좋은 책들을 외면 할 수는 없죠. 책을 만들고 기다리면 어떤 책은 본전이고, 인쇄비도 못 건지는 책들도 있습니다. 성공한 몇 권의 책들이 출판사를 먹여 살립니다. 딸이, 아빠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게 아니라 봉사활동을 한다고 해요. 우리가족은 저를 그렇게 생각해요. 돈 보고 출판사를 하는 게 아니고 사람보고 합니다. 본전으로 돌아오면 그것도 남는 것이라 생각해요(웃음)” 그의 말처럼 큰 이윤을 바라지 않는 특별한 경영철학은 책 한권 마다 사람이 됐고, 수십 년 동안 함께 걸어가는 인연으로 돌아왔다.
동아연극상 수상 직전 박성복 대표를 충무로 극장 주변 커피숍에서 만났다. 20여분 전에 약속 장소로 갔지만 두터운 잠바를 걸치고 편집장과 기다리고 있었다. 2000여 종의 책을 출판하고 200여종의 우수학술도서를 만든 출판사 대표보다는 연극인처럼 느껴졌다. 안경으로 비쳐진 인상은 훈남 노신사였다. ‘연극과 인간’에서 출판한 책은 읽고 있지만 그의 인생은 읽지를 못했다. 고집스러운 경영철학이 듣고 싶었다. 그가 커피를 주문해 줬다. 탁자 사이는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번 수상이 연극인들 마음을 담은 것 같습니다.
“평생을 연극인 주변에서 경계인으로 맴돌았어요. 상을 받게 되니까 벗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한 발 떨어져 있다가 다가선 느낌이랄까요. 제가 이만희 작가의 「아름다운 거리」라는 희곡을 좋아합니다.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그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려고 늘 노력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수상으로 그 간극이 무너지고 연극판에 뛰어든 것 같아요. 완전한 연극인이 된 것 같아요.”
그가 ‘진정한 연극인’이 된 것 같다며 웃었다. 서점 연극 분야에 가면 3분의 2 이상이 도서출판 월인과 연극과 인간에서 발간한 책이다. 그만큼 연극분야로는 독보적인 출판사로 묵묵하게 달려왔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박 대표는 출판 분야에서는 전설로 통한다. 가난한 시절은 학업에 대한 미련을 남게 했고, 이를 악물며 대학을 다니면서도 책을 파는 것은 귀재였다.
세일즈 시절에는 발품을 팔아 세계전집과 명작도서를 귀신같이 팔아치웠고 독자들한테 읽힐 수 있는 책을 찾아내는 안목이 남달랐다. 재능은 출판사 경영으로 이어졌고 성공도 했지만 고비도 있었다. 월인은 주로 현대문학, 고전과 어학, 영화연극, 인문학 위주로 출판을 해왔고 1600여종의 책들을 출판했다. 이중 연극과 희곡으로 200여종이 되고 연극과 인간에서 발간한 도서는 800여종으로 연극분야 전문도서(연기, 연극이론, 비평, 연극기술 분야 등) 로 1000여 종의 책을 출판했다. 평균 1쇄 인쇄에 500권을 기준으로 한다면 50만권 이상 연극전문 도서를 출판해왔다. 연극분야 서가에는 70%이상이 그의 출판사 책들이고 200여종이 학술우수도서로 선정됐다.
-출판 외길 인생을 고집스럽게 달려오셨어요. 적은 독자층을 생각하면 책마다 출판 결정이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1998년도에 월인을 여시고 수유동 주택으로 이전하면서 연극 전문 출판사 연극과 인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더군요.
“학교 다닐 때 문학과 미술에 미쳐본 적이 있어요. 그 영향으로 아마 자연스럽게 연극 쪽에 애정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문학책을 출판했는데 그 한 장르에 연극이 있으니까 접근하게 됐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깊이 온 거죠. 또 한 가지는 우리나라 출판시장을 봤을 때 상업 출판사가 아니었던 출판사도 대부분 상업 출판사로 돌아섰어요. 그렇게 되면 연극 책을 선호하지 않거든요. 시장이 좁고 이윤이 없기 때문이죠. 그 틈새시장으로 제가 들어간 거예요. 국문학의 한 분야인 한국 희곡에서 시작해서 영미 희곡, 러시아 희곡 등 넓혀 가다 보니까 이론서, 평론집, 연구서, 번역서, 연기 분야로 점차 확장이 된 거죠.”
박 대표는 연극인들과 두터운 인맥으로 유명하다.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동지가 됐고, 날카로운 조언을 하는 분야별 전문가그룹도 여럿된다. 그와 인터뷰를 실은 책 ‘지점에 사는 사람들’(도서출판 연극과 인간, 심규선)을 구입해 읽고 연극인들에게 물었다. 그가 달려온 인생과 출판 철학이 머릿속으로 그려질 때 온화한 인상과 날카로운 표정 사이로 평생 책을 안고 달려온 피곤함도 흘렀지만 출판인생은 행복해 보였다.
-세일즈의 달인이셨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학시절에도 출판사 운영 감각에 탁월한 안목이 있으셨던 것 같고요
“그건 아니었어요. 제일 위험한 게 아마추어는 조금 넘고 프로라기엔 조금 부족한 수준이거든요. 원래는 운동이 아주 뛰어났어요. 운동으로 성공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일찍 포기하고, 문학에 심취했다가 그것도 포기하고. 그 다음에는 미술학원에서 일을 하면서 그림 쪽으로 해볼까 했는데 그것도 안됐고(웃음) 그러다가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출판이 업(業)이 된 거죠.”
그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간 사이에 정영석 편집장은 “배울 점이 참 많은 분입니다. 저도 출판사로 다시 돌아와서 대표님과 인연을 다시 가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출판사 직원 10여명 이 초창기부터 호흡을 맞추어왔다. 박 대표는 “한 번 들어오면 절대 나가지 않는 출판사, 나갔다가도 되돌아오는 출판사”라며 웃으며 “책은 세월을 타면 언제든지 독자 손에 갈 수 있다며 이윤이 없어도 책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출판하신 책을 보니까 편집이 달랐어요. 큰 이윤이 없는 전문도서를 몇 개월 동안 출판 과정을 거쳐 책 마다 독창성 있게 출판을 하시고 계시는데, 성공한 책도 많죠?
“대답을 드리기가 어려운 게, 많이 팔린 책이 성공한 게 아니거든요. 연구사적으로 후학들에게 필요한 책을 발간했다는 게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상업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을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안 팔린 책을 쓴 학자들을 생각하면 말해서도 안 되죠.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다만 장르의 구분 없이 창작물을 선호해요. 특히 젊은 작가들의 희곡작품을 좋아합니다. 연출가 박근형씨 같은 분들을 발견하는 재미라 할까요. 그런 분들이 성공해서 연극을 하면 보람을 느낍니다.”
-책이 많이 팔리는 것보다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서 연극계나 문학계, 예술계에 거름이 된다면 만족하시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그래도 사업인데 좀 남아야 하지 않나요.
“연극하는 분들과 같은 거예요.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계신 것처럼 저도 직원들 월급만 줄 수 있다면 끝까지 하려고 해요.”
-어느 정도 책이 팔려야 출판사 경영에 선순환이 되나요.
“사실 기준은 없는데 보통 1000부 정도예요. 1000부나 500부나 종이 값밖에 차이가 안 나니까요. 그런데 최근에는 출판 시장이 침체되어서 오백 부로 찍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게 되면 선 인세를 드리니까 저자한테는 유리하죠. 또 아무리 교정교열을 잘 봐도 오탈자가 아예 없기는 어려운데 내용 수정을 바로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고요. 제작비 정도 되는 손익분기점이 500부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되는데 다 생각하면 출판을 못 하죠. 제 경우는 책을 낼 때 안팔릴 수 있다는 최악을 상정해요. 그럼 책이 나간 게 덤처럼 생각되잖아요. 날마다 행복하죠.” 그가 웃었다.
-출판사는 자식 같은 느낌일 텐데, 조만간 경영권을 넘길 예정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올해 제 나이가 65세가 됐어요. 아무래도 아날로그 사고방식이 있죠. 참신하고 새로운 기획으로 도전 정신을 가지고 운영할 분이 있으면 아무 조건 없이 주려고 해요. 출판사는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사람이에요. 이윤을 보고 가면 망할 수 있지만 사람을 보고 가면 그 사람들이 남거든요. 그게 맞는 거죠. 책을 만나는 게 아니라 사람과 만나야 해요. 앞으로 다른 분이 맡아서 하시더라도 그 부분은 이어가길 바라죠.”
-가족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으셨겠군요.
“처음에는 반대했는데 지금은 많이 이해해줘요. 딸이 농담으로 그러더라고요. ‘아빠는 모든 사람에게 호인인데 우리한테는 호구다, 모든 샐러리맨의 꿈이 아빠 같은 사장 만나는 거다’라고해요. 그렇다고 해도 저도 장사꾼이잖아요. 다만 가능한 적은 이윤을 남기고 많이 팔려고 해요.”
-읽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서점을 찾아 더 많은 책을 읽을까요?
“저뿐 아니라 모든 출판인들 바람이자 고민이겠죠. 하지만 내용이 좋으면 어떻게든 팔려요. 재밌고 유익한 책은 반드시 팔리죠. 책을 안 읽는 시대라고 해도 읽을 사람은 다 읽기 때문이에요. 작은 오탈자라도 있으면 출판사로 항의 전화나 메일도 많이 와요. 일반 독자 수준이 굉장히 높고 서평을 봐도 웬만한 평론가 뺨칠 정도로 날카로워요. 팔리는 부수가 예전에 비해 줄긴 했어도 꾸준히 나가고요. 꾸준히 읽히는 건 좋은 책이기 때문이잖아요.
-‘연극과 인간’과 ‘월인’은 출판사로 자리를 잡았지만 고비도 많으셨죠?
“고비는 숱하게 많았죠. 제일 컸던 게 편집 이사한테 경리업무를 다 맡겼어요. 그런데 경리 부정, 횡령 사건이 일어난 거죠.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대표님 설명 추가) 그런데도 버텼던 건 출판사 운영하는 데 세 개의 단계가 있거든요. 1차, 2차, 3차 통장이 있는데 2차 통장까지는 무너져 본 적이 없어요. 직원들 월급이나 거래처 대금을 한 번도 밀린 적 없고요. 그래서인지 한번 입사한 직원들은 잘 나가지 않아요. 나가더라도 금방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함께해 준 직원들 공이 커요.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람을 보고 책을 낸다고 하셨는데 출판기준이 궁금합니다.
“서문, 각주, 미주에 나오는 책과 참고문헌은 꼭 보려고 노력해요. 그렇지만 저는 전공자가 아니니까 재미로 읽는 거고, 전문가들인 우리 편집자들이 읽고 검토하죠. 또 저를 도와주는 수많은 편집위원이 있어요. 그 분들에게 물어볼 때도 많아요. 일단은 사람이 좋으면 내고 보자는 마인드지만 도용이나 표절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헷갈리는 건 자문편집 위원들한테 조언을 구합니다.”
-연극이 교과목으로 지정됐죠. 정착되고 있는 단계지만 앞으로 연극 전문출판사가 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아주 많죠. 연극 치료 분야와 매치시켜서 발달장애인들에게 보조 교재 역할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중요한 건 연극이 생활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사실 연극이고 예술이거든요. 한국연극 독자 분들도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씀 주시길 바랍니다. 출판사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으니까요. 여러 의견 주시면 반드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블랙리스트와 미투 운동 지나면서 연극 자체 보다는 연극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있는 것 같고, 좋은 연극은 있는데 관객이 없다는 얘기도 합니다.
“저는 아마추어니까 관객 입장에서 얘기한다면, 연극은 무조건 재밌어야 합니다. 좋은 연극이 재미도 있어요. 지금 관객이 줄어든 건 잠깐 위축된 거고,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해요. 몇몇의 개인이 잘못한 거잖아요. 차라리 잘된 일이죠. 완전히 곪았기 때문에 터진 것이고 이제 치료하는 단계라고 봐요. 이 계기로 여성이나 약자들에게도 동등하게 운영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이례적으로 ‘박성복 연극상’도 제정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도서출판 연극과 인간에서 연극상을 제정하시고, 분야별로 그해 최고의 책을 선정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박성복 연극상은 생각해 본적도 없어요. 저는 연극과 인연이 많은 출판사 대표입니다. 고생하시고 평생 연극으로 외길을 걸어오신 분들한테 헌정되어야죠. 도서출판 연극과 인간 연극상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이윤이 더 나서 상금을 많이 드릴 수 있을 때 가능할 것 같아요.”
동아연극상 시상식이 30분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화 속도는 빨라졌고, 그의 표정도 달라졌다. 비좁은 커피숍 공간은 얼굴 각도만 틀어도 장면이 바뀌었다.
-앞으로도 ‘적은 이윤으로 좋은 책은 반드시 남긴다’ 라는 경영철학을 지키실 겁니까
책에는 경제 원리가 들어가 있어요. 제작비를 많이 들일수록 좋은 책이 돼요. 편집, 종이 질, 제본에 아끼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잘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걸 담는 그릇도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상업성을 따지면 그렇게 못해요. 저희도 처음 5년은 적자가 심했어요. 하지만 한길을 쭉 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있는 것 같아요. 출판도 예술이고, 작품이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도 주어진 대로, 가능한 이익 따지지 않고 출판할 예정입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담배를 물었다. 이날, 시상식은 2시간 30분 정도 진행됐고, 특별상 수상은 마지막에 진행됐다. 지난해 연기상을 수상한 명계남씨가 사회를 보면서 “연극과 인간에서 출간된 책을 검색했는데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며 박성복 대표를 특별상 수상자로 호명했다. 그가 말했다. “출판도 연극과 같습니다, 예술이고, 책 한권 마다 작품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이윤 바라지 않고 출판사를 경영해 왔습니다” 연극서적만 1000여 종을 출판한 박 대표는 연극인이 되어 있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