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위력행사’ 엇갈린 판결…유죄 근거된 ‘서울·스위스 호텔’

입력 2019-02-02 04:00 수정 2019-02-02 04:00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청남도 지사가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은 후 법정 구속돼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뉴시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정무비서 성폭행’ 사건이 1일 항소심에서 정반대로 뒤집혔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이후 한때 ‘불륜 스캔들’로까지 비화됐던 전직 비서 김지은씨의 ‘미투’ 폭로가 항소심에 와서 온전히 받아들여진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행위에 대해 “현재의 성폭력 범죄 처벌 체계 하에서는 처벌 대상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지만, 항소심은 “명백한 업무상 위력”이라고 했다.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안 전 지사와 김씨 간의 ‘성폭력 진실 공방’의 쟁점은 결국 위력의 행사 여부였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결코 낮다고 볼 수 없는 피해자로서는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피해자답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이어 “피고인이 어떤 위력을 행사했다거나 피해자가 이에 제압을 당했다고 볼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항소심 재판부의 시각은 달랐다. 안 전 지사는 분명 위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었고, 김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다고 봤다. 서울고법 형사12부(홍동기 부장판사)는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피고인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충분히 제압할 권세나 지위가 있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먼저 안 전 지사와 김씨의 업무상 관계에 주목했다. 홍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사건 당시 현직 도지사로, 피해자의 인사권자였다”며 “피해자는 최근접 거리에서 수행하며 피고인의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와 권력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피해자가) 피고인을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인식하고 있었다”면서 “자신의 거취도 조직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인식했던 듯하다”고 판단했다.

안 전 지사가 김씨의 ‘거절 의사’를 알아채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1심 재판부의 해석도 뒤바뀌었다. 1심 재판부는 성관계 요구를 받은 김씨가 고개를 숙인 채 ‘아니다’고 중얼거린 것에 대해 “적극적인 거절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홍 부장판사는 “피해자가 성관계 제안에 동의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피고인도 이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는 성관계 후 안 전 지사가 수차례 “미안하다”고 사과한 점, 수행한 업무의 내용이나 연령 차이 등을 꼽았다.

강남·스위스 호텔서 “위력에 의한 간음”

항소심 재판부가 선고문 낭독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행이라고 특정한 것은 ‘서울 모 호텔’과 ‘스위스 호텔’에서의 성관계였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8월 13일 서울 강남의 모 호텔로 김씨를 불러 “씻고 오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별다른 저항 없이 안 전 지사의 지시를 따랐다고 한다. 이 부분이 1심에서 “성폭행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된 까닭 중 하나였다.

항소심은 “씻고 오라”는 표현이 “성관계를 하자는 간접적인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김씨가 안 전 지사의 지시대로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역할, 업무 태도, 안 전 지사의 요구사항을 대하는 태도 등에 비춰봤을 때 납득된다”고 말했다.

스위스 출장지에서의 성관계도 1심과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상반됐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인권이사회의 ‘지방정부와 인권 패널 토의’에 참석했다. 이때 묵던 호텔에서 세 번째 성폭행이 있었다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당시 안 전 지사는 김씨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 담배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이후 김씨가 객실로 오자 “침대로 오라”고 했다. 안 전 지사 측은 김씨가 ‘슬립’을 입은 채 왔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며 “담배를 피고인의 방문 앞에 두고 텔레그램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만 했어도 간음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1심과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복장 상태에 대해 “객실 위치나 이동 경로 등 사실관계에 비춰보면 안 전 지사 측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면서 “오히려 안 전 지사가 ‘안아달라’고 하는 등 명시적이고 적극적으로 요구한 점에서 업무상 위력을 행사해 간음한 것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그 외 2017년 7월 러시아 호텔, 지난해 2월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에서의 성관계 모두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봤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1건, 강제추행 4건 모두 유죄로 인정됐고, 강제추행 혐의 중 ‘2017년 8월 도지사 집무실에서의 포옹’만 무죄 판결됐다. 혐의 10개 가운데 9개에 대해 김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서울과 해외 출장지인 러시아, 스위스에서 김씨에게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강제추행 5회 등을 저지른 혐의를 받는다. 1심의 무죄 선고 이후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임해왔으나, 이번 실형 선고로 법정구속 됐다. 항소심은 안 전 지사에게 40시간 성폭력 치료강의 이수 및 5년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제한도 명령했다.

법정에 나오지 않은 김씨는 선고 직후 변호인을 통해 낸 입장문에서 “화형대에 올려져 불길 속 마녀로 살아온 고통스러운 시간과 작별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가 지난해 3월 5일 JTBC 뉴스룸에 나와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고백한 지 정확히 334일 만이다. 김씨는 “이제 진실을 어떻게 밝힐지, 어떻게 거짓과 싸워 이길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더 고민하려 한다”고 다짐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