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어른거린다면…고향 밭고랑처럼 푸근한 부조회화를

입력 2019-02-06 05:00 수정 2019-02-06 05:00
설 연휴 끝 귀경길, 아들 며느리 손주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들던 어머니의 허리가 추석 때보다 더 구부정해진 게 눈에 들어와 코끝이 찡했던 이들이 많을 듯하다. 고속도로 주변으로 펼쳐지는 겨울 논밭을 보며 어머니의 품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빔 17-89', 코팅한 광목에 유채, 2017년 작. 리안갤러리 제공

대구와 독일의 쾰른을 오가며 작업하는 남춘모(58) 작가의 작품들에는 어머니 품처럼 푸근한 고향의 이미지가 있다. 단색의 선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풍경은 햇빛에 반짝이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밭고랑처럼 다가와 정겹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리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작가를 지난달 중순 개막식에서 만나 작품 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빔 17-88, 코팅한 광목에 유채, 2017년 작

그의 작품은 ‘부조 회화’로 불린다. 입체의 형태를 띠면서도 평면적인 회화의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재료와 제작 기법이 특이하다. 우선, 길게 자른 광목천을 나무틀에 고정한 뒤, 합성수지 액을 발라서 딱딱하게 건조한다. 그러곤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떼어냄으로써 ‘ㄷ’자 형의 최소단위를 만든다. 그 뒤 이 ㄷ’자 광목을 캔버스 위에 연속적으로 이어 붙여서 직선이나 곡선, 혹은 벌집의 형태를 만든다. 광목천과 캔버스에는 채색도 해서 원하는 효과를 낸다.

“선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했어요. 왜 조선 시대 화가들은 화선지에 선 몇 개로 난도 치고, 대나무도 그리고 했잖아요. 우리 선조들처럼 선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어요.”
빔 18-04, 코팅한 광목에 아크릴, 2018년 작.

미술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선에서 출발한 작가는 이를 어떻게 입체적 공간으로 구현해 낼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최소 단위인 ‘ㄷ’ 형을 고안한 것이다. 이 ‘ㄷ’자 형태는 건축에서 뼈대가 되는 H빔 골조처럼 자신의 작업세계를 구축하는 가장 기본의 형태이다. “모든 군더더기를 빼고 기본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남춘모 작가.

1997년 이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천의 물성을 살려서 ‘ㄷ’ 형태를 아크릴판에 얹기만 했다. 그러다 2007년부턴 캔버스 위에 얹고 채색도 하면서 회화성을 살렸다. 회화의 확장인 셈이다. 단색으로 칠해진 표면은 한국적 추상회화인 ‘단색화’를 언뜻 연상시키지만, 캔버스의 공간 자체를 조각의 부조 개념과 합치시킴으로써 전혀 다른 결을 만들어낸다.

곡선 작업은 지난해부터 나왔다. 캔버스 바탕은 검은색으로 칠하고, ‘ㄷ’ 형태로 이어 붙인 누런 광목천은 날 것 그대로 둠에 따라 검은색과 누런색의 대비가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밭이랑 풍경처럼 다가온다. 작가가 맞장구치듯 말했다.

“어린 시절 경북 영양의 두메산골에서 자랐어요. 가진 땅이 없어 부모님은 산비탈을 개간해서 콩, 수수 등을 심었지요. 형과 제가 아버지를 도와 밭농사를 지을 때 이랑에 씌울 검은 비닐의 양쪽 끝을 잡곤 했어요. 햇빛에 반짝이던 검은 비닐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지금도 선합니다.”
캔버스에 'ㄷ'자로 붙여진 부조 회화의 표면.

그의 작품은 주로 단색이다. 검은색뿐 아니라 빨강, 파랑 등 원색도 있다. 동일한 행위와 형태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세련된 미니멀리즘, 혹은 엄정한 기하학주의를 연상시킨다. 그런데도 도회적 이미지가 아니라 푸근한 자연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광목천이 주는 천연의 느낌도 그렇지만, ‘ㄷ’형이 이어지면 만들어내는 미묘한 불규칙성의 편안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설은 누구에게나 유년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어릴 적 고향의 들녘으로 달려가고 싶다면 이 전시로 그리움을 달래보는 것도 좋겠다.

작가는 대구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뿐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 국내외에서 활발히 개인전을 갖고 있다. 3월 30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