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선고 결과가 2심에서 180도 뒤집힌 것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법원의 적극적 해석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성폭력·성희롱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4월 대법원 판결문에 첫 등장한 이후 일선 재판에 적극 반영되는 추세다.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판사 홍동기)는 1일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6개월형을 선고하면서 “성폭행이나 성희롱 소송을 심리할 때는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만이 유일한 증거일 경우 구체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배척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 김지은씨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됐다”며 안 전 지사의 10차례 범행 중 9개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1심이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며 안 전 지사의 모든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다.
2심은 이날 선고 초반에 “피해자의 진술이 사소한 부분에서 다소 일관성이 없거나 최초 진술이 다소 불명확하게 달라졌어도 진정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며 사실상 안 전 지사의 유죄를 예고했다. 2심 재판부는 이 같은 판단 기준을 바탕으로 ‘피해자다움’을 전제한 1심 판단을 하나하나 뒤집었다.
앞서 1심은 피해자 김지은씨가 피해를 당한 직후 행동이 통상 피해자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판단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김씨가 피해를 당한 다음 날아침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집을 찾으려 한 행동이다.
2심 재판부는 그러나 “순두부집을 찾는 등 행동은 피해자의 일상적 업무였다”며 “자신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이유로 간음의 피해자라고 보기 어렵다고 할 순 없다”고 판시했다.
안 전 지사 측 변호인들은 재판 내내 김씨의 ‘피해자답지 않음’을 파고들었다. 안 전 지사 측은 김씨가 피해를 당한 이후 동료들에게 장난을 치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고, 안 전 지사에 이모티콘을 사용해 친근감을 표시했다며 “피해자의 모습으로 보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평소 피해자가 문자를 이용하던 어투나 표현, 젊은이들이 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특별히 동료나 피고인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 전 지사 측은 김씨가 안 전 지사가 이용하던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하고, 안 전 지사와 함께 다른 통역관 부부와 와인바에 간 행동에 대해서도 “실제 간음을 당한 피해자의 모습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1심은 이를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정형화한 피해자라는 편협한 관점에 기반했다”며 안 전 지사 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피해자의 성격이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대처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성인지 감수성 기반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홍동기 부장판사는 이날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 문화로 인해 피해자가 성범죄 사실을 문제 삼는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 부장판사는 김씨의 2차 피해를 감안해 항소심 재판을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해왔다. 그는 오는 14일자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