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매력적인 악역이라니. 드라마 ‘SKY 캐슬’(JTBC)의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은 선하다고 하기에는 섬뜩했고, 악인이라기엔 너무 다채로웠다. 배우 김서형은 악인 김주영을 그토록 매력적인 인물로 바꿔냈다.
“저는 김주영이 단순히 악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모든 작품이 그랬던 것 같아요. 역할과 그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갖고 연기를 했었죠. ‘아내의 유혹’(SBS·2008)의 신애리도 그런 연민을 갖고 하지 않았다면 그저 질타만 받는 악역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최상위 학부모들의 입시전쟁을 그린 ‘SKY 캐슬’은 연일 신화를 쓰고 있다. 뛰어난 몰입감으로 비지상파 최고 시청률 기록을 가진 ‘도깨비’(tvN)의 아성을 일찍이 무너뜨렸고, 지난 26일 19회에서는 23.2%(닐슨코리아)를 나타내며 최고기록을 경신 중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캐슬 주민들의 삶과 시청자들의 마음을 뿌리째 뒤흔든 김주영 역의 김서형은 극의 성공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이 중 한 명이다.
29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선배가 불을 지피고 갔다”고 말했다. 극 초반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아들 박영재(송건희)의 복수심을 알게 된 후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이명주 역을 열연한 김정난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을 줄은 예상을 못 했어요. 처음엔 10%만 나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근데 1, 2회에서 정난 선배를 보고 나서는 ‘이렇게 잘하고 빠지면 우리는 어떡해’ 이런 생각을 했어요(웃음). 정난 선배님이 불씨를 지피고 가서인지 배우들끼리 더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연기와 작은 부분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시는 감독님 덕분에 힘들어도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김주영이라는 인물 뒤에는 세심한 분석과 준비가 있었다. 강렬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왔던 그였기에 전작들과 다른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섬세한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많은 신경을 쏟은 건 외형적인 부분이었다. 의상 시안도 2개를 준비했었다고.
“엄마 4명과 차이점을 확실히 두어야 할지 아니면 같은 엄마로서 비슷한 콘셉트의 의상으로 가야 할지 고민을 했었어요. 올 블랙 콘셉트를 잡고 나서는 명상실이나 사무실을 보면서 의상 소재는 어떤 게 좋을지 체크를 했었죠. 로봇처럼 모퉁이에서 몸을 탁 틀거나 가방이 흔들리지 않게 걷는 등의 몸짓에도 신경을 썼고요. 머리를 계속 뒤로 넘기고 있는 건 정말 힘들더라고요. 아파서 현장에선 매번 화가 나 있었죠(웃음).”
극이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꽁꽁 묶인 채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고.
“김주영은 여태껏 만난 역할 중에서 제일 머리 꼭대기에 있는 여자였어요. 뒤에 더 센 캐릭터가 되면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 과거는 주로 다른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데, 저는 갑자기 감정을 폭발시키는 신들이 많았어요. 대본이 끝까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감정을 끌어올리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10년간 해온 수많은 작품이 다행히도 허투루 한 건 아니었다고 느꼈죠.”
영광 뒤엔 남모를 아픔도 있었다. 1994년 KBS 16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김서형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드라마 ‘어셈블리’(KBS2·2015) ‘기황후’(MBC·2013) ‘샐러리맨 초한지’(SBS·2012)와 영화 ‘악녀’(2017)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한 그는 ‘아내의 유혹’(SBS·2008)에서 신애리라는 독보적인 악역을 탄생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소모가 크고, 힘든 시기기도 했다고. 처음 'SKY 캐슬‘ 출연을 거절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제가 모르는 저 자신을 미리 발견하고, 도전하게 해준 작품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다만 무슨 작품을 하더라도 따라다니는 악역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이나 신애리라는 인물을 떨쳐내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신애리를 연기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아팠고, 힘이 부쳤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죠.”
김서형은 “이번 작품을 통해서 비슷한 악역이어도 ‘김서형이 한다면, 김서형이면 (새롭다)’이라는 느낌을 최대한 드리고 싶었고,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온라인을 가득 메운 숱한 김주영 패러디들도 그가 보여준 그런 새로움 때문 아닐까.
“저희 배우들끼리도 단체 대화방에 패러디 캡처를 올려서 재밌게 보곤 해요. 제 인스타그램에도 올리고요. 볼 때마다 창의력과 특색 있는 아이디어에 놀라죠. 지금이 제2의 전성기라기보단 전작을 열심히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 어떤 작품으로 찾아뵐지 고민 중이에요. 작품을 끝내면 작품 고민이 제일 먼저 남네요(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