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할머니가 그린 ‘고향집’, 소녀는 집에 갔을까… 페북지기 초이스

입력 2019-01-29 16:49
소녀가 갓난아이를 업고 서있습니다. 왠지 신발을 신지 않은 듯 남루한 차림입니다. 그래도 소녀의 얼굴은 밝습니다. 고향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길만 가면 날 기다리는 엄마를 만날 수 있겠죠. 그런데 길이 멀기만 합니다. 가로등 아래 서있지만 불이 켜져 있는지 확실하지 않네요. 어딘가 쓸쓸한 그림입니다. 소녀는 언제쯤 그리운 고향집에 갈 수 있을까요. 지금은 갔을까요. 29일 페북지기 초이스입니다.

김복동 할머니가 그린 ‘고향집’. 출처=‘25년간의 수요일’ 154p. 윤미향 지음.

이 그림은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그린 것입니다. 김 할머니는 전날 밤 10시41분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향년 92세를 끝으로 별세하셨습니다.

그림은 윤미향 일본군 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이사장의 책 ‘25년간의 수요일’에 실린 것입니다. 전 지난해 12월 윤 이사장을 인터뷰한 뒤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오늘 김복동 할머니 별세 소식을 듣고 책을 펴보니 이런 사진이 있군요.

책에는 김복동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도 있답니다. 머리를 곱게 넘기고 한복을 차려입은 사진이 있습니다. 너무나 쌩쌩해서 더 슬픈 마음이 듭니다.

김복동 할머니 젊었을 때. 출처=‘25년간의 수요일’ 16p. 윤미향 지음.

김복동 할머니는 1926년 5월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습니다. 41년 열다섯 살 때 일본인에게 속아 징용으로 알고 정신대에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8년간 대만과 광둥성, 홍콩, 싱가포르,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자바섬, 말레이시아, 방콕 등으로 이동하며 성노예로 짓밟혔습니다.

책을 보면 할머니가 얼마나 끔찍하게 생활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광둥에서 매일 15명의 군인들이 찾아왔으며, 주말에는 그 숫자가 50명에 육박했다고 증언합니다. 저녁에는 장교들이 찾아왔으며, 이들 중 많은 수가 밤을 보내고 갔다고 합니다.”(책 78P)

출처=‘25년간의 수요일’ 170p. 윤미향 지음.

김복동 할머니는 살아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바로 농사를 시작했고 남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고 매일매일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사셔서 돈을 많이 버셨다고 합니다. 수중에 돈이 생기면 주변의 힘든 분들에게 다 주곤 하셨다고 하네요.

김복동 할머니가 대단한 건 더 있습니다. 전쟁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전 세계 곳곳을 돌며 여성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92년엔 피해자임을 밝혔고 이듬해엔 유엔인권위원회에 파견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또 이후에도 여러 나라를 돌며 전쟁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등 인권운동가로 활약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왼쪽)가 2015년 6월 제1184차 수요시위에서 전재산 5000만원을 나비기금에 기부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출처=‘25년간의 수요일’ 269p. 윤미향 지음.

특히 김복동 할머니는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나비기금을 시작하겠다는 특별한 선언을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 폭력으로부터 해방돼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 수 있기를 염원하는 의미에서 기금을 모으자고 제안했습니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만약 일본으로부터 법적 배상금을 받는다면 전쟁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쓰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그러나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가 편히 잠드시길 기원합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