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2018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시안컵에서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받아든 성적표다. 경기가 끝난 후 모든 선수가 고개를 숙였다. 59년 만에 정상탈환을 노렸던 아시안컵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아시안컵 8강 탈락은 2004년 중국 대회 이후 15년 만이다.
화가 났다. 더 아시아의 맹호를 자처하기엔 부끄러운 경기였다. 단순한 탈락 이상의 의미다. 지난 17일(이하 한국시간) 중국전(2대 0승)을 제외하면 단 한 경기도 속 시원한 경기가 없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며 박수칠 수 있는 경기력이 아니었다.
일본은 오심과 경기력 논란 등에 이은 비아냥 속에서도 4강까지 꿋꿋이 전승가도를 달렸고, 베트남은 비록 탈락했지만 자신들의 축구를 했다. 그들은 결과를 얻어내거나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었다. 벤투호는 달랐다. 졸전 속에 받은 성적표는 처참했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스토리텔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해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16강 탈락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에게 박수 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이 잘 싸웠기 때문이다. 탈락이 유력한 상황에서도 당시 우승 후보이자 FIFA(국제축구연맹) 1위를 질주하던 독일을 2대 0으로 완파했다. 선수들의 투지가 경기에 묻어났고 대중들은 대표팀 경기에 열광했다.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물을 생산해내진 못했지만 모두가 대표팀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 아시안컵은 달랐다.
한국은 25일 UAE 아부다비의 자예드 스포츠시티에서 열린 카타르와의 2019 AFC 아시안컵 8강전에서 0대 1로 패배했다. 후반 33분 압델아지즈 하팀에게 통한의 선제골을 허용했다. 번번이 중거리 슛을 허용했던 것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전반전 잔뜩 웅크려있다 후반전 라인을 끌어올려 공격적으로 올라왔던 카타르의 전략적 승부수가 통했다.
이날 패배는 벤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직후 첫 패배였다. 벤투 감독은 16강전을 앞둔 21일 기자회견에서 경기력에 대한 일각의 지적에 대해 직접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바 있다.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데 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균열의 불씨가 될 조짐은 분명히 있었다. 지쳐있는 선수들도, 반복되는 공격 루트와 경기패턴도 그중 하나였다. 선수들의 줄부상 속 의료진 인사문제 등 외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더 큰 균열은 그라운드 안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벤투 감독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이유는 그래서다.
플랜 B의 부재가 실패를 불러왔다
벤투 감독은 베스트 11에 큰 변화를 두지 않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 시절부터 그랬다. 한번 믿음을 준 선수를 계속 같은 포지션에 기용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수들의 기용에 한해서, 혹은 포메이션 적 얘기다. 같은 포백수비의 스리톱이라도 측면을 넓게 벌려 서는 네덜란드의 정통 스리톱과 바르셀로나의 스리톱은 전혀 다른 시스템이다. 전술적 다변화와 공격 루트의 진화. 팀의 정체성을 넘어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지난 아시안컵 다섯 경기를 복기해보면 벤투호는 항상 비슷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4-2-3-1 포메이션과 익숙한 선발진. 노출됐던 문제점들 역시 한결 같았다. 세로 수비라인 간격을 타이트하게 유지한 상대 수비수들을 상대로 공간을 찾지 못했고, 측면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무의미한 크로스만 반복됐다. 횡패스와 백패스로 무의미한 점유율만 쌓아나갔다. 뒷공간을 내주지 않는 수비 지향적 팀을 상대로 해법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 이번 아시안컵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 한국을 꺾기 위해 상대했던 팀이 들고 나왔던 공략법은 모두 비슷했다. 같은 수는 결국 5번 연속 통하지 않았다.
카타르전은 마치 지난해 월드컵 마지막 경기였던 독일전을 보는 듯했다. 다만 포지션이 바뀌었다. 카타르가 그때 한국의 역할이었다. 전반전엔 좁은 간격을 유지한 채 전방압박을 시도했던 한국 공격수들을 상대로 잔뜩 수비적으로 내려앉아 좀처럼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밀조밀한 두 줄 수비가 서로 간 라인을 컨트롤하며 지역방어 체제를 유지하는 데만 집중했다. 다섯 명의 일자 수비라인은 절대 간격을 벌리지 않았다. 후반전 자신들의 준비했던 카운터를 치기 위한 포석이었다. 역습과 위협적인 중거리 슛 기회만을 엿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벤투 감독은 이날도 4-2-3-1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미세한 전술적 변화는 있었다. 황희찬이 지난 16강전에서 입은 경미한 부상으로 곧바로 뛸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법은 황인범 시프트였다. 황인범이 기존보다 라인을 올려 황의조 바로 아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서고, 손흥민이 우측으로 빠지는 방식이었다. 포메이션 상 손흥민은 오른쪽 측면에 있었지만 전반전에선 황인범 위치까지 이동해 오른쪽으로 처진 삼각형 모양 형태를 띠며 경기를 풀어나갔다. 중앙에서 간격을 깨기 위해 집중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결국 후반전 들자 손흥민은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왼쪽 측면으로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날 승리한 카타르도 경기력은 형편없었다. 바로 직전 23일 이라크와 혈투를 벌였던 체력적 한계점이 노출됐다. 오히려 휴식시간에선 한국보다 하루 더 적었던 그들이었다. 한국도, 카타르도 모두 지쳐있었다. 앞선 4경기에서 7골을 넣으며 이번 대회 단독 득점 선두로 올라선 골잡이 알모에즈 알리도 이날만큼은 별다른 위협적인 장면을 연출해내지 못했다. 역습상황에서 종종 빠르게 치고 올라오긴 했지만 김민재의 벽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손흥민 역시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왼쪽 측면에서 볼을 잡고 중앙 페널티박스 아크 지역으로 들어오며 때리는 강력한 슛은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플레이다. 하지만 가장 자신 있는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전술적으로 중앙과 오른쪽 측면에 위치가 제한되다 보니 연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지난해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는 강행군으로 지쳐있었던 10월 A매치 때를 보는 듯했다. 후반 26분, 상대 수비수들의 동선이 서로 엉키며 손흥민에게 행운이 찾아왔으나 그가 때린 슛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조용히 골키퍼 품에 안겼다. 최근 토트넘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였던 손흥민의 슛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벤투 감독은 해법을 찾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날 한국이 기록한 유효 슛은 단 2개. 통계수치에서 알 수 있듯 중앙에서 원하는 공격을 전혀 하지 못했다. 선수들의 줄부상이라는 불운도 있었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축구다. 감독 데뷔 15년 차인 베테랑 벤투 감독은 자신의 신념만을 앞세운 나머지 이 점을 망각했다.
실패는 분명, 그래도 평가는 다음에
첫 패배가 안겨다 준 내상은 깊었다. 대회를 조기 마감했다는 사실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늦은 시각 잠 못 든 채 경기를 지켜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했던 대중들의 마음이다. 지난해 월드컵 이후 대표팀을 향한 축구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월드컵 독일전과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불붙은 축구 열기는 절정에 달했었다. 팬들의 사랑은 경기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난해 10월 우루과이전(2대 1승)에선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이 5년 만에 매진됐고 이승우와 황인범 등 어린 선수들은 하루아침에 아이돌 못지않은 스타가 돼 인기를 누렸다.
아쉬운 경기력과 성적이 가져다주는 무서움은 대중의 모진 회초리가 아니다. 성과와 대중들의 관심은 비례한다는 잔인한 스포츠의 명제다. 관심과 실망의 무게감은 동일하다. 실망을 안겨준 시점이 하필 축구 열기가 절정에 치닫고, 유료 관중 수 확보에 고민을 겪었던 K리그 경기장에 봄바람이 불었던 지금이었다.
다만 경기를 지켜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을 대중들에게 벤투호에 대한 평가는 잠시 ‘보류’해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카타르가 이번 아시안컵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이다. 카타르 대표팀을 이끄는 펠릭스 산체스 감독은 FC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카타르에서만 10년을 넘게 머물렀다. 유소년 지도자를 시작으로 A 대표팀까지 단계적으로 올라온 인물이다. 현재 아시안컵 카타르 대표팀에 승선해 있는 선수들도 대부분 연령별 대표팀에서 차례차례 올라오며 오랜 시간 발을 맞춰왔다. 자국에서 개최하는 2022 월드컵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을뿐더러 이번 대회를 앞두고 한 달에 걸쳐 유럽의 강호들을 비롯해 충분한 평가전을 치렀다.
반면 벤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지는 이제 5달. 직접 선수들을 불러 소집했던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았다. 유럽파 선수들과 아시아권 선수들의 소집 시기 차이도 있었다. 승리의 향방은 이렇듯 준비의 차이에서 발생했다. 아시안컵은 단기간에 준비하고 우승을 할 수 있는 가벼운 대회가 아니다. 시작점을 뗀 지 얼마 되지 않는 벤투호의 평가를 보류했으면 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플랜A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바탕엔 본고사까지 시간적 제한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토대를 만드는 것에 우선 집중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다.
이번 대회에서 벤투의 전술적 오판은 분명히 있었다. 남은 것은 지난 경기를 복기하며 자신의 오판과 시스템의 다변화를 바탕으로 기존 신념에 얽매이지 않고 실패를 성공의 자양분으로 축적하는 것이다. 혁신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 하지 않았던가. 최종 목적지인 2022 카타르 월드컵이 끝난 후 지난 4년을 되돌아봤을 때 이번 아시안컵이 좀 더 의미 있게 다가오길 바란다.
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 전광판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태화 기자가 함성소리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전하는 스포츠 연재입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