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국경장벽 건설을 위해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비상사태 선포를 강행할 경우 민주당과의 극한 대립과 함께 법정 다툼까지 불거지면서 셧다운(연방정부 업무중단) 사태는 더욱 길어질 공산이 크다.
백악관은 국경장벽 건설을 위해 예산 70억 달러를 배정하는 내용의 비상사태 선포문 초안을 준비 중이라고 CNN방송이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남부 멕시코 접경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의회의 예산 배정 없이 장벽 건설을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CNN은 행정부 내부 문건을 입수해 이같은 내용을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초부터 비상사태 선포를 통해 민주당의 반발을 우회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내비쳤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실행에 옮길지를 두고는 회의적인 시각이 더 많았다.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부에서도 반대 기류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 측도 트럼프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즉시 위헌소송으로 맞불을 놓겠다는 태세다.
CNN에 따르면 비상사태 선포문 초안은 “매일 미합중국으로 불법 입국하는 외국인 수는 어마어마하다”면서 “이는 국가의 안전과 안보에 직접적 위협이 되므로 국가비상사태를 구성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러므로 본인 도널드 트럼프는 미합중국 헌법과 국가비상사태법 등 법률이 부여한 권한에 따라 미국 남부 국경지역에 국가비상사태가 현존함을 선포한다”고 적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비상사태 선포 시 장벽 건설에 총 70억 달러를 의회 동의 없이 배정할 계획이다. 범죄수익 몰수자산기금에서 6억8100만 달러, 군사건설 자금에서 36억 달러, 국방부 민간사업자금에서 30억 달러, 국토안보부 자금에서 2억 달러를 충당한다는 것이다. 이 액수는 당초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 측에 타협안이라며 제시했던 57억 달러보다 13억 달러 정도 많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에게 “나는 다른 대안을 갖고 있다. 필요하다면 그 대안을 쓸 수도 있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길 바란다. 군대 역시 원하고 있다. (불법 이민은) 우리 나라에 대한 사실상의 침략과 같다”고 주장했다.
만약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면 미 육군 공병대가 즉각 파견돼 장벽 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건설 예정지 내 민간 소유 토지는 수용 조치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사유재산 수용 문제 때문에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에도 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부 문건에는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환경영향평가 절차를 생략하고 계약 관련 법률의 적용도 면제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의 거센 저항은 불가피하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포에 위헌 소송 제기로 대응하겠다는 뜻을 이미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국경장벽 건설을 밀어붙이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 동의 없이 납세자의 세금을 쓰는 게 과연 옳으냐는 비판도 많다.
한편 셧다운 사태를 종식시키겠다며 트럼프 행정부와 민주당이 각각 발의한 예산안은 모두 부결 처리됐다. 미 상원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국경장벽 건설비를 요구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예산안과 함께, 국경장벽 관련 내용을 통째로 들어낸 민주당 예산안을 함께 표결에 부쳤으나 모두 부결됐다.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의 부적절한 언행도 구설에 오르고 있다. 윌버 로스 상무장관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급여를 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연방정부 공무원들에게 “대출을 받으면 되지 왜 무료 급식소 같은 데 가느냐”며 “(공무원들은) 아주 낮은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이냐”고 말했다. 행정부 내 손꼽히는 ‘금수저’인 로스 장관을 프랑스 혁명 당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하며 비꼰 것이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