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호 미술기자’로 통하는 이구열(사진) 선생의 문집 ‘청여산고(靑餘散稿) 1·2’(에이엠아트)가 출간됐다. 88세를 뜻하는 미수(米壽) 기념으로 나온 이 책은 제목 그대로 1949년부터 지난해까지 다양한 매체에 실렸던 ‘흩어진 원고(散稿)’ 100편을 두 권으로 묶은 것이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인근 카페에서 최근 만난 이 선생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책은 1권에선 고희동 김은호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등 20세기 미술가 50여명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조명했고, 2권에선 미술기자와 미술평론가로서 한평생 써온 에세이와 평론을 묶었다.
그는 “내일모레면 구십이다. 내 삶의 엔딩작업 같은 것”이라고 책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아직 남은 원고가 있으니 구순까지 산다면 속편도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1권 첫머리를 장식한 고희동 인터뷰는 그가 만든 잡지 ‘미술’의 첫 호를 위해 이뤄졌던 것이다. 일본 유학파 1호 서양화가 고희동의 개인적 삶을 격동의 한국사와 교직시켜 아카이브로서도 손색이 없는 글이다. ‘스스로 외로움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천경자 선생의 인터뷰 등 글마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쓰는 솜씨 덕분에 술술 읽힌다.
“그때만 해도 저 같은 (미술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니, 신문 잡지 여기저기서 청탁을 많이 받았어요. 그걸 모은 게 이 책이지요.”
그는 59년부터 73년까지 민국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대한일보에서 일했는데, 기자 생활 14년 동안 오로지 미술과 문화재 기사만을 썼다.
“모 논설위원이 미술평 쓰는 기사가 없다며 부탁해온 글을 쓴 게 미술기자로 데뷔하는 계기가 됐지요.”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서울에 나올 때마다 헌 책방을 들러 반 고흐, 폴 세잔 등의 미술책을 사서 읽었다. 전쟁 통에 홍대를 중퇴했지만, 독학으로 쌓은 미술 분야 실력만은 낭중지추였다. 실력이 입소문이 나면서 여러 언론사에서 그를 스카우트해갔다. 특히 서울신문 기자 시절에 100회에 걸쳐 쓴 ‘문화재 수난사’는 일제강점기 문화재 유출에 관한 귀중한 보고서로 평가받는다.
“내가 복이 많았어요. 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달리 봐주기도 하고….”
신문사를 옮길 때면 ‘미술하면 이구열이지”하며 자신을 불러들였던 동료들을 회고했다. “너나없이 가난했지만, 그 대신 좋은 친구들, 동료들이 있어 좋았던 시절”이라며 요즘의 ‘혼자 문화’에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문화부장으로 지내던 민국일보가 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돼 언론계를 떠난 이후에는 ‘한국미술전집’(전 15권, 동화출판공사, 1975)과 ‘한국근대회화선집’(전 27권, 금성출판사, 1986∼1990)의 기획과 편집을 진행했다. 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의 미술 부문 편집 위원으로 근대미술 관련 수백 항목을 혼자 집필했다. 한국 근대 미술사가 그에 의해 정리되고 편집됐다고 할 만하다.
“이름대로 거북이(龜)처럼 뚜벅뚜벅 걸어왔어요. 재바르지 않아 토끼하고는 경쟁할 수 없으니 자기 페이스대로 살아온 거지. 나름대로 만족스럽습니다.”
처음엔 자비로 개인 문집이나 만들 심산이었다. 그러나 김복기 아트인컬쳐 대표 등 그의 글들이 가지는 힘을 아는 미술계 후배들이 나서준 덕분에 책 출간으로 이어졌다. 미술계 선후배간 우의가 빛나는 책이다.
글·사진=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