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딜 캐리력까지 입증한 ‘바이퍼’ 박도현

입력 2019-01-23 22:46

그리핀 원거리 딜러 ‘바이퍼’의 다재다능함이 빛났던 한 판이었다.

비(非) 원거리 딜러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박도현이 원거리 딜러 캐리의 정수를 선보였다.

그리핀은 23일 서울 종로구 LCK 아레나에서 진행된 2019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스프링 정규 시즌 1라운드 경기에서 한화생명e스포츠를 세트스코어 2대0으로 제압했다. 그리핀은 이날 승리로 3승0패(세트득실 +6)를 기록, 리그 단독 선두로 치고 올라갔다.

이날 1세트에서 그리핀은 시즌 개막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정글러 ‘타잔’ 이승용이 한화생명의 연속된 카운터 갱킹에 두 차례 전사해 경기 주도권을 내줬다. 상대에게 대형 오브젝트를 내리 내주면서 좀처럼 성장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벼랑 끝의 그리핀을 구출해낸 건 카이사로 맹활약한 박도현이었다. 그는 그리핀이 판세를 뒤엎었던 29분 정글 전투에서 상대 주력 딜러를 향해 과감한 앞 돌진을 시도, 절묘한 움직임으로 트리플 킬을 가져갔다. 에이스를 띄운 그리핀은 내셔 남작을 사냥,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박도현은 해당 세트 38분, 경기 마지막 대규모 교전에서 펜타킬로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과감한 위치선정 이후 한화생명 챔피언을 차례대로 처치했다. ‘트할’ 박권혁(우르곳)의 스킬을 요리조리 피하며 생존한 박도현 덕에 그리핀은 그대로 경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박도현은 LCK 원거리 딜러 중 비 원거리 딜러 챔피언을 가장 잘 다루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원거리 딜러 선수들은 비 원거리 딜러 챔피언 다루기를 싫어하지만, 그는 비 원거리 딜러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각(角)만 잘 나온다면 괜찮다”고 긍정적으로 답하곤 한다. 그 애매모호한 의미의 한 글자는 그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박도현의 폭넓은 챔피언 폭은 지난해 LCK 서머 시즌에 입증됐다. 그는 정규 시즌에만 티모를 포함해 총 15개 챔피언을 꺼냈다. 그중 기존 원거리 딜러 챔피언은 카이사, 이즈리얼, 루시안 뿐이었다. 모스트 픽은 전승 카드 블라디미르(7회)였다.

반면 기존 원거리 딜러 챔피언 숙련도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아왔다. 박도현에게는 ‘데프트’ 김혁규(킹존), ‘룰러’ 박재혁(젠지), ‘테디’ 박진성(SKT) 등 LCK 내 라이벌들에 비해 정통파 원거리 딜러 챔피언으로 증명한 게 없다는 인식이 박혀있었다.

그러나 이날 카이사로 맹활약하면서 박도현은 자신에 대한 편견을 깨부쉈다. 더불어 그리핀이 미드-정글 캐리 외에도 다른 승리 공식을 갖고 있음을 입증했다. 앞으로 그리핀을 상대해야 하는 팀들에 또 하나 고민거리를 심었다. 단순 승리 이상의 소득을 거둔 하루였던 셈이다.

“그냥 잘한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붙기 마련이지만, 이 친구는 그냥 잘한다.”

그리핀이 아직 LCK를 호령하기 전이었던 지난해 4월, 김대호 감독은 박도현이 어떤 선수인지 소개해 달라는 말에 그렇게 다섯 글자로 답했다. 당시에는 성의 없어 보이는 답변이었지만, 지금와서 보면 그보다 더 박도현을 잘 표현하는 미사여구가 없다. 정말 그냥 잘한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