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만큼 사진에 관한 책 중에서 널리 읽히는 책도 드물다. 1980년 바르트가 사망하기 직전 저술한 이 책은 지금도 국내외에서 일반인뿐 아니라 사진 전문가도 많이 참조하는 사진 이론의 고전이다.
‘밝은 방’이 여전히 국내외 인문예술학 부문의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지만 약점이 있다.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책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바르트가 자신의 사고 흐름을 질서정연하게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밝은 방’에 펼쳐진 그의 사유 방식은 통일적이지 않고 파편적이며, 은유적이고 주관적이다.
국내 독자는 이 책의 프랑스어 원본, 영어 번역본, 한글 번역본에 접근할 수 있다. 바르트가 직접 저술한 원본을 읽는 것이 그의 사고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만 프랑스어를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에겐 버거운 일이다. 국내 독자는 한글 번역본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만 이 경우에도 내용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은유‧압축‧파편으로 점철된 난해하고 심오한 프랑스어 문장을 언어 체계가 전혀 다른 한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트의 난해한 사상을 국내 일반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 나왔다. 서울대 미학과 박상우 교수가 펴낸 ‘롤랑 바르트, 밝은 방’이다. 박 교수는 이 책에서 사진에 관한 바르트의 복잡한 개념들을 10개의 키워드로 명확하게 제시했다.
바르트의 ‘밝은 방’은 크게 전반부(24장)와 후반부(24장)으로 구성돼 있다. 부제 ‘사진에 관한 노트’에서 ‘노트’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 책은 엄정한 형식과 체계를 갖춘 학술서가 아니다. 개인의 에세이처럼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을 지닌,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이를 적어놓은 일종의 ‘메모’다.
‘밝은 방’은 1인칭 주관적 시점에서 쓰였으며,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저자 자신의 사적인 내용이 많아진다. 이 책은 개인의 일기처럼 작가의 사적인 삶을 다룬 내용, 즉 어머니의 죽음과 슬픔, 나의 가족, 나의 취향 등으로 점철돼 있다.
박 교수에 따르면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을 사회학적 관점이나 미학적, 예술적, 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사진이라는 현상을 다룬,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진현상학’에 가깝다.
바르트는 사진의 탄생을 인류 역사에 등장한 ‘새로운 현상’으로 여긴다. 그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 그림이 탄생했고 이후 문자가 발명되었으며 19세기 초반에 이전까지 존재하던 모든 이미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미지인 ‘사진’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등장을 새로운 이미지의 현상, 인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라고 언급했다. ‘밝은 방’에서 그는 사진이 이미지의 역사에서 왜 새로운 현상인지 분석하려 한다. 그리고 사진을 대하는 자신을 문화‧문명‧지식의 바깥에 위치시켜 순진하고 비문화적이며 원시적인 시선을 지닌 인간으로 규정한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매체인 사진을 마주하며 끊임없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설정한다. 결국 바르트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자신의 의식이 사진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한다고 박 교수는 분석했다.
바르트는 사진을 보는 자에게 발생하는 정서적 효과를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으로 구분한다. 사진 이론에서 이 두 용어만큼 널리 알려진 개념은 드물다. 두 개념은 우리의 의식에서 사진에 관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박 교수는 ‘밝은 방’을 관통하며 바르트가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은 ‘사진의 특수성’이라고 본다. 사진의 근본적 속성, 즉 사진이 언어나 다른 이미지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것이다. 즉 사진의 ‘존재론(ontologie)’을 다루는 책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특수성을 탐구하기 위한 연구 방법으로 기존의 비평 학문인 사회학, 기호학, 정신분석학을 도입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사진이 자신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emotion)’을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채택했다. 바르트는 “나는 감정을 통해서만 사진에 관심을 가진다”고 했다. 바르트는 사진의 특수성을 찾기 위해 이 책 전반부에서 ‘쾌락(plaisir)’과 ‘욕망(desir)’의 관점으로 총 15장의 사진을 분석한다.
바르트는 수많은 사진을 검토하면서 왜 특정사진이 충격적인 피사체가 전혀 없는데도 그에게 ‘충격’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탐구하려 했다. 반대로 보도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중 사람들에게 소위 ‘외상(trauma)’을 주는 사진이 왜 그에게는 전혀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지 분석하려 했다. 그는 사진 앞에서 느끼는 이같은 자신의 감정의 실체를 대립하는 두 감정, 즉 일반적인 흥미의 감정을 지칭하는 ‘스투디움’과 외상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지칭하는 ‘푼크툼’으로 나누고 이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말했다.
바르트는 책의 전반부 마지막 장에서 사진들을 검토하며 자신의 욕망과 쾌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았지만 사진의 본질을 파악하려 했던 자신의 기획은 실패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바르트는 책의 후반부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진의 특수성을 다시 탐구한다. 대신 이번에는 쾌락의 관점이 아니라 쾌락보다 훨씬 심층적인 감정인 ‘사랑과 죽음’의 관점을 통해 사진의 본질을 탐구하기로 한다. 바르트는 결국 책 전반에서 쾌락, 사랑, 죽음을 통해 사진의 특수성을 밝히려 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죽음’의 사진 철학을 전개한다. 그 핵심은 ‘사진과 죽음의 관계를 다룬 철학’이다. 그는 “사진에 대해 우리가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고자 한다면 사진을 죽음과 연관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가 이처럼 독특한 사진 철학을 가지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77년 10월 25일에 일어난 어머니의 죽음이다. 1915년 세상에 태어난 뒤 1년이 채 되지 않아 아버지를 여읜 바르트는 대부분의 삶을 어머니와 살아간다.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자, 가장 사랑했던 가족인 어머니를 잃은 바르트는 깊은 상실에 빠져든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옛 사진들을 뒤적거리다 소녀 시절에 촬영한 어머니 사진 한 장(이른바 ‘온실 사진’)을 발견하고 그 사진을 통해 죽음과 연관된 자신의 사진 철학을 발전시킨다.
바르트는 이런 철학을 심화시켜 하나의 테제를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그 테제란 ‘사진에 촬영된 대상은 과거에 반드시 카메라 앞에 있었다’라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그 대상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즉 죽음을 암시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진은 ‘더 이상 없음’이라는 부재와 죽음의 증명이다. 그는 지금 살아있는 대상을 촬영한 사진도 이 테제의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 대상이 촬영된 순간, 바로 그 순간은 지나가버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에서 사진을 촬영하거나 바라보는 행위는 ‘더 이상 없는 것’ 곧 죽음과 접촉하는 행위다.
하지만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에서 극한의 정서적 충격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지시체의 존재(과거)와 죽음(현재)의 수수께끼를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진에 재현된 인물이 사진을 보는 자인 바르트와 사랑 혹은 연민 관계여야 한다. 사진을 보는 자가 사진에 재현된 지시체를 사랑하는 감정을 지닌 채 지시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보는 자가 사진에서 느끼는 감정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사진에서 체험하는 이 같은 절대적 감정을 진정한 ‘광기’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바르트는 이 책의 예시 사진으로 사물이나 풍경 사진이 아니라 대부분 인간이 등장하는 초상 사진을 선택했다. 그리고 초상 사진 중에서도 특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사적인 사진(가령 어머니의 소녀 시절 사진)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했다. 바르트는 “회화와 바대로 이상적인 사진은 사적인 사진 즉 누군가와 사랑의 관계를 가진 사진이다. 사진에 재현된 인물과 비록 가상적일지라도 사랑의 관계가 있다면 그 사진은 모든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결국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전개한 사진 철학은 사진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범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박 교수는 ‘롤랑 바르트, 밝은 방’을 통해 자칫 무거운 철학적 주제일 수 있는 사진의 존재론에 낭만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 난해한 원서를 술술 읽어넘길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지은이 소개
박상우
서울대 인문대학 미학과 조교수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2000~2008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진영상학을 전공해 석사학위와 박사학위(2008)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홍익대학교에서 사진미학, 사진과 현대미술의 관계, 영상미학, 매체미학, 예술론 등을 강의했다. 문자를 대신해 오늘날 새로운 현대 언어가 된 사진과 영상이라는 기술 이미지가 인간의 감각과 지각 방식, 세계관, 존재 조건, 예술 개념 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재배치하는지 규명하려 한다. 저서로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두 얼굴’(공저, 2012), 논문으로는 ‘롤랑 바르트의 사진 수용론 재고’(2016) ‘빌렘 플루서의 매체미학: 기술이미지와 사진’(2015) ‘빌렘 플루서의 사진과 기술이미지 수용론’(2015) ‘롤랑 바르트의 어두운 방: 사진의 특수성’(2016) 등이 있다.
김재중 산업부장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