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H는 최근 가족사의 비밀(부모의 이혼)을 가장 믿었던 친한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비밀 유지를 해주지 않고 다른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에 H는 비밀을 지켜주지 못한 친구에게 몹시 화를 냈다. 또 다른 친구들에게도 화를 냈다. 가족들에게도 심한 분노 폭발을 자주 했다. 급기야 무기력해져 학업에도 집중을 못하고 인터넷에만 빠져들었다. SNS를 통해 낯선 아이들과의 채팅으로 밤을 새더니 등교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H는 믿었던 친구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겼다. 하지만 H의 가장 핵심적인 감정은 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이었다. 가장 깊은 곳의 ‘상실’이라는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H는 분노 감정만을 폭발시켰다. 그 분노를 불특정한 사람과 자신에게도 표출했다. 이로 인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감을 공감해주며 들어보니 밑바닥에 있는 상실감을 이야기 했다. 실타래처럼 몇 년 전 부모의 이혼으로 더 큰 ‘상실’을 경험하고도 그런 감정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일이 드러났다.
H의 부모는 이혼으로 아이가 상처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넘어가는 아이가 강하다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아이가 슬픔에 빠질 까봐 부모의 이혼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고 자주 여행, 놀이동산에 데리고 가서 슬픔을 잊게 하려고만 하였다. H가 이번 사건을 겪을 때에도 아이의 상실감을 이해해 주기 보다는 ‘세상에 좋은 친구는 많단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되지’라는 식으로 아이의 감정을 회피하게만 만들었던 거다.
그러는 사이 H는 ‘세상 사람들은 언젠가 나를 다 떠나는 구나’ ‘끝까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라고 극단적인 생각에 이른다. 또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라서 친구도 아빠도 나를 떠났고, 엄마도 언젠가는 나를 떠날거야’라는 생각에 이르러 자신을 부정하며 자기 파괴적으로 등교도 거부하고 안 좋은 행동에 빠져들었던 거다.
친구가 자신의 비밀을 누설한 것에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 쏟아낸 후에도, 친구와 억지로 화해시키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친구와 사건에 일어난 일들을 아주 작게 쪼개어서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생긴다면 친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친구에 대해 느끼는 극단적인 배신감이 지나치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친구에 대한 감정도 ‘완벽한 신뢰감’과 ‘극단적인 배신감’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도 있다. 빈 의자 기법을 사용하여 의자를 앞에 두고 친구에게 말하는 듯이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해보고, 반대로 친구의 입장에 되어서 감정을 말해 보는 것도 감정을 객관화 하는데 도움이 된다. 친구에게 편지를 써보도록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편지는 실제로 보낼 필요는 없고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