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대통령 20일 쉴 때 국회 보좌진 94%는 연가 사용 0일

입력 2019-01-06 04:00 수정 2019-01-06 04:00

19대 국회 때부터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해온 자유한국당 의원실의 A 비서관은 “3년 반 동안 쓴 연가는 4일이 전부”라며 한숨을 쉬었다. A 비서관은 “연가를 사용하기 어렵다 보니 추석 성묘 전에 벌초해본 기억이 없다. 매번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혼자 하시는 것을 보면 마음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결혼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B 비서관은 4개월째 신혼여행을 못 가고 있다. 지난해 정기국회가 끝난 후 신혼여행 일정을 짜보려고 했지만, 정기국회 이후 곧바로 임시국회가 잡히면서 신혼여행을 1월로 연기했다. B 비서관은 5일 “1월에도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며 “다른 친구들처럼 일주일 이상 신혼여행을 가는 것은 꿈”이라고 말했다.

보좌관 생활 8년 차인 한국당 의원실 C 보좌관은 “국정감사에 TF가 계속되면서 6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다”며 “주말에도 못 쉬는데 연가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같은 당 D 보좌관도 “여성들의 경우 연차는 물론, 출산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해 임신하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아직 있다”며 “국회의원실은 사실상 ‘노동 치외법권 지대’와 다름없다”고 토로했다.


◆전체 국회 보좌진의 6%만이 연가 사용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 보좌진들은 법에 규정된 연가 사용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일과 삶의 균형'을 강조하면서 국가공무원의 연가 사용을 독려하는 상황이지만 별정직 공무원이자 입법부 소속인 국회 보좌진들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일보가 국회사무처로부터 제출받은 ‘20대 국회 보좌진들의 연가 사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대 국회 개원 이후 하루라도 연가를 사용한 보좌진의 수는 2016년 19명, 2017년 87명, 2018년 168명에 불과했다. 주 52시간제 전면시행으로 연가 사용자 수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여전히 연가를 사용한 보좌진 수는 전체 보좌진(2700명)의 10%도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국회 보좌진들의 평균 연가 사용일수도 2016년 2.9일, 2017년 4일, 2018년 3.7일로 공무원 최소 법정 연가일수인 11일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지난해 국가공무원의 1인당 평균 연가 사용일수 10.9일에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는 수치다.

◆정당·국회의원 성향별로 연차 사용도 천차만별
연가 사용 환경은 정당별로도 크게 엇갈렸다. 민주당 소속 보좌진이 한국당 소속 보좌진보다 연가를 많이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올해 연가를 사용한 민주당의 보좌진 수는 107명으로 한국당(30명)의 3배에 달했다. 연가를 사용한 한국당 소속 보좌진 수는 2016년 2명, 2017년 18명으로 민주당에 비해 크게 저조했다. 야당 의원실의 한 비서관은 “의원과 보좌진의 관계가 수직적인 한국당 쪽이 상대적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민주당 보좌진들보다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각 의원실의 연가 사용 환경도 천차만별이다. 비교적 자유롭게 연가를 사용하는 의원실이 있는 반면에 국회의원 임기 내내 연가를 못 쓰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연가 양극화’는 국회 보좌진들의 인사권을 국회사무처가 아닌 국회의원이 쥐고 있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국회의원 한 명이 소수의 직원을 고용하는 영세한 구조다 보니 의원 개인의 성향에 따라 연가 사용 환경도 좌우되기 쉽다. 한국당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연가 사용이 어려운 것으로 악명 높은 의원실이 몇 있다”며 “좋은 의원을 만난 보좌진들은 그래도 속 편하게 휴가를 갔다 올 수 있지만, 의원이 워커홀릭인 경우 연차 사용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과다한 업무대비 부족한 인력이 문제
보좌진들의 휴식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데에는 과다한 업무 대비 부족한 인력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의원수당법에 따라 의원 한 명에 배속되는 보좌진은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9급 비서 4명, 인턴 1명 등 9명이다. 하지만 운전, 행정 등의 필수 업무와 지역구에 파견되는 인원을 제외하면 사실상 3~4명의 인원이 대 행정부 업무와 의사일정을 챙기는 구조다. 적은 인원으로 행정부와 민원인, 언론 등을 상대해야 하는 특성상 장시간 과로에 시달리기 쉽다. 국정 이슈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터지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업무에 매여 있게 되는 것도 문제다. C 보좌관은 “오죽하면 막노동판보다 국회가 주 52시간이 가장 늦게 적용되는 곳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겠냐”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조혜진 민주당 보좌진협의회장도 “한 명이 빠지면 업무 공백이 커지니 의원실 내에서도 서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처럼 국회의원들도 솔선수범해서 휴가 써야
하지만 국회의원실의 인력 확충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보좌진 수를 늘리려면 국회의원수당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낮은 상황에서 예산이 투입되는 법 개정은 쉽지 않다. 국회사무처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대신 보좌진 수를 7명으로 줄이는 선거구제 개편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보좌진 수는 더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이유로 일선 보좌진들 사이에서는 상사격인 국회의원이 제대로 연가를 사용하는 문화부터 자리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문 대통령이 연가를 사용하면서 청와대 참모들의 연가 사용을 독려했듯이 의원들 역시 연가를 사용함으로써 보좌진들의 연가 사용에 물꼬를 터줘야 한다는 것이다. 바른미래당 소속인 E 비서관은 “의원이 연가를 사용하지 않는데 어떻게 보좌진이 연가를 사용하겠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조 회장도 “연가 저축제 등 제도적인 보완책이 나오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며 “문 대통령이 솔선수범해 연차를 썼듯이 국회의장과 각 의원이 연차를 쓰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보좌진들도 연차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우삼 신재희 기자 s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