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정신과 의사가 숨진 가운데, 동료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남궁인 이화여대부속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임상조교수는 1일 자신의 SNS에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의학과 교수가 올렸던 글을 공유했다. 해당 글은 임 교수가 남궁 교수의 글을 본 뒤 답글 형식으로 작성한 것이다. 당시 남궁 교수는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해자 담당의 입장에서 응급실 내원 당시 상황을 전하며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사망한 임 교수는 “얼마 전 응급실에서 본 환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신 선생님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며 “긴박감과 피냄새의 생생함 그리고 참혹함이 주된 느낌이었으나 사실 참혹함이라면 정신과도 만만치 않다”고 글을 시작했다.
이어 “각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삶의 가장 힘겨운 밑바닥에 처한 사람들이 한가득 입원해 있는 곳이 정신과 입원실이다. 고통은 주관적 경험이기에 모두가 가장 힘든 상황”이라며 “도대체 왜 이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그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고 적었다.
아울러 “그분들은 내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하시고 나 또한 그분들에게서 삶을 다시 배운다”며 “그 경험은 나의 전공의 선생님들에게 전수되어 더 많은 환자들의 삶을 돕게 될 것이다. 모두 부디 잘 지내시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또 “이렇게 유달리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퇴원하실 때 내게 편지를 전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20년 동안 받은 편지들을 꼬박꼬박 모아 놓은 작은 상자가 어느 새 가득 찼다”며 “이번 주말엔 조금 더 큰, 좀 더 예쁜 상자를 사야겠다”고 글을 마무리했다.
남궁 교수는 “불의의 사고를 전해 듣고 그가 남겼다는 글을 보았다”며 “그는 환자들의 말이 참혹했다고 썼다. 피와 살이 튀지 않아도, 누군가 내 앞에서 인생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잔인한, 이 사람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지옥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인간사의 일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들은 내 앞에서 지나가버리지만, 정신과 의사는 그들과 힘겹고 긴 여정을 함께 한다. 그는 그가 돌보는 환자들의 이야기에 감응했고, 기억했으며, 같이 고통스러워했고, 참혹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글을 썼을 것이었다. 그는 좋은 의사이자,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아울러 “이번 사건은 너무 어처구니없고, 너무 끔찍한 것이기에, 도저히 내가 더 붙일 수 있는 말이 없다. 너무 많은 애도가 필요한 시대가 애달프지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이밖에 없어 나는 한다. 나는 나의 연말과 새해, 신년의 모든 소원과 축원과 희망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훌륭한 선배이자, 동업자이자, 참혹한 전방에서 일생을 바쳤던 그의 영원한 명복과 안식, 깊은 애도를 위해 바치겠다”고 애도했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이밖에 없어 슬프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마음연구소 소장 역시 1일 자신의 SNS를 통해 임 교수를 추모했다. 서 소장은 “좋은 사람이 먼저 갔다. 차분하고 착하고 신중한 사람인 것은 처음부터 느꼈다. 진료 시간도 지났기에 환자를 안 봐도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진료를 했다. 환자를 피해 도망가는 중에도 다른 의료진을 챙기다가 결국 당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선 허리 아프지 않길. 그리고 너무 따듯하게 살지도 말길”이라고 적었다.
앞서 서울 종로경찰서는 지난달 31일 오후 5시44분경 강북삼성병원에서 박모(30)씨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박씨는 이날 예약도 없이 불쑥 임 교수를 찾아왔다. 그는 마다 않고 외래 진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박씨는 느닷없이 흉기를 꺼내 임 교수와 자리에 있던 의료진을 위협했다. 의사는 함께 있던 간호사들을 대피시킨 뒤 복도로 도망치다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즉시 응급실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30분쯤 숨졌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