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입원실, 참혹하지만… 나의 일” 피살된 정신과 의사가 남긴 글

입력 2019-01-02 09:16 수정 2019-01-02 09:19
정신과 진료 상담 중이던 의사가 환자에게 흉기에 찔려 사망한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에서 경찰 과학수사대 대원들이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뉴시스

정신과 의사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가운데, 그가 생전에 남겼던 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지난달 31일 오후5시44분경 강북삼성병원에서 박모(30)씨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박씨는 이날 예약도 없이 불쑥 고(故) 임세원 신경정신의학과 교수를 찾아왔다. 그는 마다 않고 외래 진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박씨는 느닷없이 흉기를 꺼내 임 교수와 자리에 있던 의료진을 위협했다. 의사는 함께 있던 간호사들을 대피시킨 뒤 복도로 도망치다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즉시 응급실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30분쯤 숨졌다.

박씨는 이날 간호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긴급체포됐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는 범행은 시인하지만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횡설수설하고 있다”며 “피의자의 소지품 등 객관적 자료 분석 및 피의자 주변 조사 등을 통해 계속 확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임 교수의 부고를 전해들은 뒤 성명서를 통해 애도했다. 학회는 “2018년 마지막 날 저녁에 날아온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에 애통하고 비통한 감정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며 비통해했다.

학회는 “본인에게는 한없이 엄격하면서 질환으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돌보고 치료하고 그들의 회복을 함께 기뻐했던 훌륭한 의사이자 치유자였다”며 “진료현장은 고통과 슬픔을 극복하는 희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재발과 회복의 반복을 일선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치료현장은 결코 안락한 곳은 아니다”라고 씁쓸해했다.

이어 “의사에게 안전한 치료환경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환자에겐 지속적 치료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국의 정신보건의료 제도 하에서 이러한 사고의 위험은 정신과 의사와 치료 팀의 의료진이 감내해야한다”고 지적했다.

학회는 임 교수가 생전 SNS에 게재했던 글을 공개하기도 했다. 임 교수는 “각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삶의 가장 힘겨운 밑바닥에 처한 사람들이 한가득 입원해 있는 곳이 정신과 입원실”이라며 “도대체 왜 이 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그 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고 적었다.

이어 “이렇게 유달리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퇴원하실때 내게 편지를 전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20년 동안 받은 편지들을 꼬박꼬박 모아 놓은 작은 상자가 어느 새 가득 찼다”며 “이번 주말엔 조금 더 큰, 좀 더 예쁜 상자를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 다음은 고인이 SNS계정에 올린 글 전문.

얼마 전 응급실에서 본 환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신 선생님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긴박감과 피냄새의 생생함 그리고 참혹함이 주된 느낌이였으나 사실 참혹함이라면 정신과도 만만치 않다.

각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삶의 가장 힘겨운 밑바닥에 처한 사람들이 한가득 입원해 있는 곳이 정신과 입원실이다. 고통은 주관적 경험이기에 모두가 가장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보다 객관적 상황에 처해 있는 관찰자 입장에서는 그중에서도 정말 너무 너무 어려운, 그 분의 삶의 경험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혹함이 느껴지는, 도저히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도대체 왜 이 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 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그 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 이렇게 유달리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퇴원하실때 내게 편지를 전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20년 동안 받은 편지들을 꼬박꼬박 모아 놓은 작은 상자가 어느 새 가득 찼다.

그 분들은 내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하시고 나또한 그 분들에게서 삶을 다시 배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의 전공의 선생님들에게 전수되어 더 많은 환자들의 삶을 돕게 될 것이다. 모두 부디 잘 지내시길 기원한다.

이번 주말엔 조금 더 큰, 좀 더 예쁜 상자를 사야겠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