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샷 찍으러 전시회 간다… SNS에서 유행하는 ‘비주얼 전시’

입력 2019-01-01 05:00
'슈가플래닛'을 찾은 고등학생 이은지(18)양이 전시회장 내에서 휴대전화로 팔목에 두른 티켓을 찍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르누아르:여인의 향기'에 마련된 즉석사진 기계.

이제는 전시에서도 ‘인생샷’이 키워드다. 찍을 수 있어야 가고, 잘 찍혀야 흥행한다. 분주한 걸음으로 카메라에 작품을 담는 것이 요즘 전시회장의 신(新)풍경. 침묵 대신 나지막한 대화가 공간을 채우고, 가끔씩 ‘찰칵’ 소리가 활기를 더한다.

전시회를 접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젊은 세대는 지인의 소셜미디어(SNS)에 게시된 작품 사진을 보고 관람하고 싶은 전시를 고른다. 촬영 장소로 얼마나 적합한지도 고려 대상이다. 대형 미술관에 으레 붙어있던 ‘촬영 금지’ 안내판은 이들에게 낯설다. 이런 흐름에 맞춰 사진 촬영을 적극 권장하는 전시도 늘고 있다. 젊은 관람객들은 전시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고, 이는 자연스레 홍보 효과로 이어진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진 좀 찍어주실래요?”

거대 디저트 공장을 떠올리게 하는 ‘슈가플래닛’은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전시 중 하나다. 전시 제목을 번역하자면 ‘설탕 행성’. 네티즌 사이에서 이른바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장소로 꼽히고 있다. 각 전시 구역은 솜사탕, 초콜릿 등을 주제로 꾸며졌다. 곳곳에 포토존도 마련돼 있다. 기획사 ㈜미디어앤아트는 “보고 듣고 만지며 즐기는 오감 만족 전시”라고 소개한다.

최근 서울 성동구 서울숲 인근 갤러리아포레 지하 1층에 마련된 슈가플래닛을 찾았다. 평일 낮 시간대였는데도 매표소가 제법 북적였다. 표를 받고 전시회장으로 들어서자 눈에 띈 것은 입구 한쪽에 놓여 있던 폴라로이드 사진기 다섯 대. 담당 직원은 “3000원에 카메라를 대여할 수 있고, 전용 필름은 1만원에 10장씩 판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시간30분 동안 빌릴 수 있다고 한다.

슈가플래닛에서 제공하는 폴라로이드 사진기 대여 서비스. 이 카메라로 전시회장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전시는 시작부터 달콤했다. 공업용 설탕이 언덕처럼 쌓여있었는데, 그 위를 장식한 것은 ‘당신을 좋아하는 일’과 같은 낭만적인 문구의 팻말이었다.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분홍색, 푸른색 등 다채로운 색감이 눈길을 끄는 사진이 여러 장 나온다. 평면 작품은 이게 전부였다. 초콜릿 공 모양의 ‘볼풀 수영장’이나 대형 솜사탕 모형처럼 직접 만질 수 있고, 사진 찍기에 좋은 공간이 이어졌다.

관람객은 대부분 연인, 또는 친구 사이인 듯했다. 다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상 관람객’이 되지 않기 위해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꾸고, 대화도 삼가는 보통의 ‘전시장 매너’를 이곳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홀로 전시를 찾은 직장인 김예랑(26)씨는 다른 관람객에게 촬영을 부탁하기도 했다. 김씨는 “전시회에 자주 가는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다들 흔쾌히 응한다”고 말했다.

전시회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관람객들. 사진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김예랑(26)씨는 이날 혼자 전시를 찾았다. 김씨는 주변에 있는 관람객에게 촬영을 부탁하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전시회 선택 기준 질문하니 “사진이죠”

슈가플래닛에서 만난 많은 관람객은 전시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 중 하나가 포토존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번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봤다는 여고생 이은지(18)양은 “1년에 1~2번 정도 전시회를 찾는데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을 선택한다”며 “촬영한 사진은 SNS에 올린다”고 말했다. 이양과 함께 온 대학생 부예주(20)씨도 “친구가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관람하고 싶은 전시를 고른다”고 했다.

부씨처럼 SNS 게시물로 알게 된 전시를 인터넷에서 검색한 뒤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인터넷 검색 대신 ‘해시태그’를 활용하기도 한다. 단어 앞에 해시기호(#)가 붙는 것을 해시태그라고 하는데, 이를 SNS에 입력하면 관련 게시물이 모두 나온다. 가장 많이 쓰이는 SNS는 사진 기능이 강조된 인스타그램이다. 대학생 김규리(20)씨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슈가플래닛을 알게 됐다”면서 “보기만 하는 전시보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친구와 슈가플래닛을 찾은 김규리(20·오른쪽)씨가 촬영을 위해 자세를 취하고 있다. 김씨는 "사진을 못 찍는 전시보다는 촬영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갈 것 같다"고 했다.

이날 슈가플래닛 외에도 같은 건물 지하 2층에 있는 ‘르누아르:여인의 향기(르누아르)’ 전시를 둘러봤다. 기획사 본다빈치㈜에 따르면 프랑스 인상파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대표작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구현한 ‘컨버전스 아트’ 형식의 전시다. 다양한 색채의 영상물이 전시 공간을 채우고, 8가지 테마의 포토존도 있다. 이곳에서 만난 고등학생 양지원(17)양은 “친구의 SNS를 본 뒤 오게 됐다”며 “해시태그로 검색한 다른 게시물도 미리 찾아봤다”고 했다. 함께 온 이하늘(17)양도 “궁금해하는 친구들을 위해 사진을 찍어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샷 초점 맞춘 ‘비주얼 전시’… 티켓 판매량 급증

슈가플래닛과 르누아르는 비주얼 전시다. 전시 공간 전체를 특별한 콘셉트의 포토존처럼 꾸민 전시다. K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나의 어린왕자에게’도 이 중 하나다. 대림미술관의 ‘나는 코코 카피탄,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의 경우 포토존 중심의 전시는 아니지만, 작품 자체의 감각적인 분위기 덕분에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소셜커머스 티몬에 따르면 지난달 비주얼 전시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71%가 증가했다. 주 고객층은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 슈가플래닛 측은 주요 타깃을 10대 후반~20대 초반 여성, 르누아르의 경우에는 20대~30대 초반 여성으로 설정했다. 실제 전시회장에서 만난 관람객 다수는 이 연령대의 여성이었다.

K현대미술관 최영신 큐레이터는 “전시회를 기획할 때 포토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작품을 설치하고 남은 공간을 활용해 시각적 요소들을 연출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달 21일 개막한 프랑스 사진작가의 전시도 작가의 허락을 받아 전시장 내에 작업실을 구현했다”면서 “작가가 작업실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물품을 공수했다”고 덧붙였다. 또 “SNS 홍보의 힘이 크기 때문에 전시장 내 사진 촬영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수요 생겼을 뿐… 기존 관람객 니즈(needs) 여전히”

비주얼 전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관람객 사이에서도 불평이 나올 때가 있다. 르누아르를 찾은 직장인 임정선(45)씨는 “신선하다고 느끼지만 사진 위주의 전시만 인기를 끄는 것은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슈가플래닛에서 만난 대학생 서용완(21)씨 역시 “여자친구와 같이 갈 때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찾게 된다”면서도 “전시 자체의 질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생각은 어떨까. 슈가플래닛을 기획한 ㈜미디어앤아트의 김철식 콘텐츠제작1팀 팀장은 전시 트렌드의 변화를 인정했다. 그는 “과거에 작품과 관람객을 나눠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면 요즘은 직접 만지거나 느끼는 체험형 전시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슈가플래닛의 초코볼 수영장. 관람객들이 수영장 안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있다.

SNS, 그중에서도 인스타그램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SNS 이용자끼리 직접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비용을 들인 마케팅보다 더 효과적”이라며 “홍보 부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김 팀장은 “아예 기획 단계에서 인스타그램에서 입소문이 날 수 있는 콘텐츠 위주로 찾는다”고 설명했다.

‘지나치게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서는 “이전의 접근방식으로 보면 그렇게 느낄 수 있다”면서도 “지금은 이런 새로운 작업에 대해 정의를 내려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슈가플래닛은 평면화된 작품을 공간화한 뒤 냄새나 촉감 등 감각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덧붙였다.

김 팀장은 이어 “기존 방식의 전시회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며 “새로운 전시층이 생긴 것일 뿐 기존 영역이 사라진 건 아니다. 사진 그 자체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김나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