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16일 국회 내에 신설된 익명 단체인 ‘국회 페미’가 최근 언론 인터뷰를 갖고 “성평등한 국회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국회의원 보좌진, 국회 직원 등 여성 30여명이 모인 페미니스트 모임이다. 이들은 국회에 아직도 팽배한 성차별적 인식들을 조목조목 짚으며, 페미니즘이 이미 시대정신이 된 상황에서 국회가 나아갈 방향을 진단했다.
국회서 여전히 자행되는 여성 외모 품평
지난 31일 KBS 보도에 따르면 ‘국회 페미’는 “여성들이 국회 내에서 여전히 차별 받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회원인 ‘탈린’은 성범죄 가해 의혹을 받는 남성들을 바라보는 남성 의원들의 태도를 전했다.
그는 “피해 여성 외모가 어땠다느니, 근무 태도가 원래 그랬다느니 식으로 피해자를 조롱했다”며 “김지은씨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게 ‘미투’ 운동을 대하는 국회의 태도인가라는 회의가 들었다”고 씁쓸해했다. 김지은씨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전 수행비서로, 안 전 지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한 주인공이다.
또 다른 일원인 ‘행비’는 “어느 방 비서 몸매 참 좋더라, 짧은 치마 입고 다니는데 남성들을 유혹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쟤는 뭘 좀 아는 애다, 이런 식으로 여성들을 가십으로 소비하는 행태가 여전하다”고 분노했다.
‘이도’라는 회원도 “국회 내부망을 통해 직원 사진을 검색할 수 있는데 그걸 캡처해 돌려본다”며 “얘가 여기에 있더라, 얘 예쁘더라 이러면서 (외모 품평을 한다)”고 폭로했다.
“여성은 가장 오랫동안 외면된 정치 현안이다”
‘국회 페미’는 여성 문제를 국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외면 당한 사회 문제라고 주장한다. 국회 내에서 여성 문제는 사소하고, 주변화된 지엽적인 문제로 취급된다.
행비는 “여성 문제는 곧 사회 문제인데 국회 안에서는 사소하게 취급된다”며 “이건 여가위(여성가족위원회)가 해야 할 일, 또는 여성 의원의 일, 여가부(여성가족부)의 일로 계속 미룬다”고 설명했다.
또 “‘여성 문제에 대해 ‘그건 국회가 아니라 여성단체가 해야 하는 업무 아니냐’고 말하는 남성 의원들도 있다”며 “페미니스트인 여성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없어도 아무런 지장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을) 유권자로서 존중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회
이들은 국회 내 성차별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오랫동안 뿌리 깊게 자리잡은 남성 중심 문화를 지목한다. 국회의원 대다수는 남성이다. 비교적 발언권이 센 여성 보좌관 역시 소수, 전체의 7%에 불과하다. 대신 직급이 낮아질수록 여성의 비율은 높아진다. 8~9급 직원들 중 여성 비율은 50% 이상. 이들은 대부분 행정비서 역할에 그친다.
행비는 “(여성 관련) 법안이 나왔을 때 (남성 의원들에게) 여성은 전혀 정책적인 대화를 나눌 상대도, 의견을 수용해야 하는 존재도 아니다”라며 “온라인에서 논쟁할 때는 일대일로 부딪혀서 설명하는 게 가능하지만 국회에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다 하급이니까”라고 안타까워했다. “이건 여성혐오가 아니다”라는 일방적 주장이 늘 승리한다고도 했다. 이도는 “여성은 암묵적으로 급수 제한이 있다. 올라가 봤자 8급”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행비는 또 “‘국회 내 여성 직원들에게 ‘모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며 “남성을 돌봐주는 역할을 여성이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또 “여성 의원이라는 이유로 남자 보좌관들이 존중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봤다”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성 의원이었다면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회에는 여성 의원이 여성 보좌관을 채용하면 날개 한쪽을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이 떠돈다. 만약 보좌관 두 명이 모두 여성이라면 날개 없는 의원이라는 눈총을 받는다.
행비는 여성 의원이 부족하다는 점을 꼬집으며 “여성이니까 편의를 봐주자는 게 아니다. 동등한 경험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여성이 공천을 받는 데는 분명한 제약이 있다. 여성 대표성을 늘리자는 건 특혜가 아니라 분명히 가져와야 하는 몫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 의원이 늘어나는 것은 비단 여성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국회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여성 의원이 증가해야 한다. 여성 의원만이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회를 바꾸려면, 국회부터 솔선수범해야
‘국회 페미’는 성평등한 국회를 만들 것을 거듭 강조했다. 이들은 “사회 변화를 좀 더 실효적으로 완성하려면 국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행비는 “아마 국회는 (성차별 의제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며 응답하지 않는 게 자신들에게 더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이런 생각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가 이전보다 더 어렵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문제를 의제화하고 공론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도는 “페미니즘은 이미 시대정신으로 가고 있다. 국회가 지금은 외면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귀를 기울이고 반응할 거라고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싶다”며 “이제 국회가 제대로 응답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