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입력 2018-12-31 13:45 수정 2018-12-31 13:47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크게 세 가지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

첫째로, 그들은 선민의식이 투철한 민족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다” 라는 選民의식! 이 선민의식은 후대에 와서는 자기네 민족 이외의 모든 민족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자신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의식으로 발전돼 예수님께 책망도 많이 받았지만, 좋은 의미에서의 선민의식은 역사적으로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바빌로니아 통치하에서 포로 신세로 살 때도, 페르샤의 지배를 받을 때도, 알렉산더의 통치를 받을 때도,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을 때도, 이 선민의식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민족적 수난을 겪으면서 더욱 강열해졌다.


이 선민의식은 곧 민족적 자긍심이 되어 지금도 그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 살든지 근면과 성실, 도덕성과 창의성 면에서 선민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강렬한 선민의식으로 인해 지금도 불과 800만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이지만,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들에 비해서 오늘 우리는 그러한 민족적 자긍심을 지니고 있는가. 지금 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은 ‘코리안’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한때는 우리에게도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몇 가지 용어가 있었다.

“우리는 단일민족이다”, “도의를 숭상하는 동방예의지국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다” 등등 몇 가지 타이틀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것을 민족의 긍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 우리 사회의 도덕성 마비와 퇴폐풍조 현상을 보면 우리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온갖 폭력과 흉악범죄의 양상을 보면 도저히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턴가 ‘헬조선’(hell+朝鮮, 지옥 같은 한국이란 뜻)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가 ‘헬조선’이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큼 그토록 저주스럽고 떠나고 싶은 나라인가.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다고 해서, 교육비가 많이 들고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 찾기가 어렵다고 해서, 또는 각계각층에 부조리가 많고 적폐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헬조선’ 딱지를 붙여도 되는가.

우리 민족은 병자호란, 임진왜란, 6·25전쟁, 미군정, 군사독재 등 숱한 역경의 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이르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지만 군부독재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은 불과 30년도 채 안 되었다.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은 가난에 한맺힌 시절을 살아 왔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 불과 40~50년 전이요,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허리끈을 졸라매던 시절이 불과 30~40년 전이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 시절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전태일열사 같은 분들이 붕어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떼워가며 공장에서 밤새워 미싱을 돌리던 그 시절을 오늘의 젊은이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면 용공분자로 잡혀가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 생활을 해야 했던 그 선배 세대의 희생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 정도라도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외친다는 것이 너무도 사치스럽지 않은가.

우리 민족은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요, 저력 있는 민족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세계 12~13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를 돌아다녀 보면 곳곳에서 한국산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볼 수 있다. 아이돌 가수들의 한류열풍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박항서 축구감독으로 인해 베트남 국민은 한국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지금도 세계 방방곡곡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근면성과 창의성은 사실 놀라울 정도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나라에서 돈벌이 하겠다고 동남아 각국에서 찾아온 노동자들로 인해 우리나라의 3D 업종이 굴러가고 있다. 우리 민족 역시 유대인들 못지않게 우수한 자질과 저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 못지않게 우리도 고난 속에서 연단된 민족이기에 오히려 희망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닌 정체성을 긍지로 여기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비록 병들고 찌들린 역사지만 우리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긍지로 여기고 보존하고 전승하며,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현실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도덕적 품위를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선민의식 아니겠는가.

두번째로, 이스라엘 민족정신 중 위대한 점은 결코 과거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약 신명기 26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절을 지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은 감사절을 지킬 때마다 먼 옛날 자기네 선조들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해서 엑소더스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오늘 우리의 추수감사절처럼, 한 해 농사 잘 지었다고, 또는 한 해 동안 사업 잘해서 이만큼 이익을 남겼다고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파라오의 압제에서 건져내신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 광야생활 40년을 거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들은 과거를 되씹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지금 뉴욕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도 유월절이 되면 누룩 안 든 떡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이집트에서 해방된 그날을 기념한다. 장막절이 되면 아파트 옥상에라도 천막을 치고 일주일동안 살면서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기억한다. 몇 천 년이 지난 과거의 역사를 그 후손들에게 들려주고 전승시킨다.

그들은 히틀러 나치 치하에서 600만명의 동족이 학살당한 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자기들이 돈을 내서 세계 방방곡곡 유명한 관광지와 공원마다 나치학살을 기억하도록 조각들을 세우고, 전시관을 세웠다. 철조망에 갇혀 있는 모습, 고통 속에 죽어 가는 모습, 집단학살을 당해 버려진 시신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조각으로,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그들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하여 유대인 수용소가 있던 그 자리에 기념관을 세우고, 그 기념관 입구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백성은 그 과거를 다시 한번 체험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 민족에 자행한 죄악상, 우리의 딸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위안부로 삼았던 치욕적인 과거, 우리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동력을 착취했던 그 아픈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돈 몇 푼 받고 잊어버린다면 우리 민족은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가해자인 그들이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물론 깨끗이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고 일본과도 좋은 이웃 나라로 지내야 한다. 역사의 방향만큼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의 억압 아래서 민족의 주체성을 찾으려했던 3.1운동정신, 독재에 항거했던 4.19정신, 그리고 오직 하늘의 은총으로 해방을 맞았던 8.15 해방, 1980년 봄 우리의 광주에서 있었던 동족살상의 비극을 망각하지 말고 역사발전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과거가 영광스러운 것이든 비참한 것이든 결코 잊어버린 적이 없다.

기념행사로, 축제로, 노래로, 그림으로, 조각으로, 길이길이 후손에게 전승하면서 역사발전을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역사는 해석사여야 한다. 단순한 히스토리(history)가 아닌 게쉬히테(Geschichte)여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부여한 해석사를 후대에 계승할 줄 알아야 역사발전이 이루어진다.

세번째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민족정신은 미래지향적인 역사의식에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그 옛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약속의 땅은 장구한 역사동안 땅 한 평 없이 더부살이로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 속에서 항상 강열하게 불타오르는 미래지향적 역사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생활 40년을 거쳐서 막상 그 땅에 당도해 보니 그 땅은 기대와는 달리 형편없는 박토였다. 지중해 연안지역과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매마른 광야 사막지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약속된 땅’(promised land)임을 그들은 굳게 믿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완전요리를 해서 떠먹여주는 축복이 아니라 언제나 재료만 주시는 축복이다. 가능성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 그 자료를 가지고 내 입에 맞도록 요리를 해먹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신 책임인 동시에 축복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아는 백성이었다. 그들은 그 땅을 열심히 가꾸고 일궈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었다.

처음에 ‘약속의 땅’은 지정학적 개념이었다. 요단강 건너 팔레스타인 땅 어느 지역.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그 개념은 미래지향적 이데올로기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 민족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 민족에게 약속의 땅은 어디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그곳은 평화로운 나라요, 자유롭고 정의로운 복지사회요, 통일된 조국이 아니겠는가. 더 이상 전쟁이니 부정부패니 인권유린이니 적폐청산이니 하는 용어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사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도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있는 나라,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고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노는 사회가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의 정신상태로 그 땅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정치권에서부터 시작해서 무엇이 옳고 그르냐, 어느 것이 정의고 어느 것이 불의냐 하는 기준은 사라진 지 오래고, 오직 어느 것이 나에게 이익이고 어느 것이 나에게 불이익이냐 하는 기준만 남다. 한탕주의, 향락문화, 지역이기주의, 온갖 사회악이 암세포처럼 구석구석에 만연되어 있다. 이 나라 지도층은 한결같이 부동산투기, 탈세, 위장전입, 논문표절 등으로 얼룩져서 깨끗한 지도자를 찾기가 모래밭에서 바늘줍기와 같이 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군사독재시절과 냉전시대를 그리워하며 역사발전에 저항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다.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중에 겪은 최대의 위기는 모세를 없애고 다른 지도자를 세워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는 쿠데타 음모였다. 현재의 광야생활이 고생스럽다고,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과거의 노예생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었다. 만약 그때 모세의 지도력이 흔들렸다면 이스라엘에 약속의 땅은 영원한 신기루로 끝났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군사독재 치하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룬 지도 30여년 되었건만 아직도 전근대적 노예근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는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키고,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들을 훈련시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야훼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 야훼 하나님은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세계 방방곡곡에서 인류해방의 역사를 수행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 하나님께서 73년 전 우리에게도 해방을 주셨고, 머지않아 그 완전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믿는다. 문제는 지금 그 약속의 땅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데도 우리의 정신무장이 덜 되어서, 의식개조가 덜 되어서,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아서, 그 땅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될 일은 우리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다. 회개를 통해 거듭나고, 과거지향적인 의식을 개조하고, 노예근성 제거하고, 허위의식 몰아내고, 도덕성을 높여야 한다. 이렇게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면서, 그 땅을 향한 행진을 계속할 때 머지않아 야훼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민족의 발걸음을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강영선 목사(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