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의 역사는 그 자체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사이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든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집트 문명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세계 최고의 문명이다.
바다와 사막으로 둘러싸인 나일강 하구 삼각주 평야지대에서 시작된 이집트 문명은 큰 변화 없이 장구한 세월 동안 문명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사통팔달인 곳에 위치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한 문명이 오래 존속할 수가 없었다.
이라크 지역은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였고 이후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등의 고대 국가들이 이 지역에서 생겼다가 멸망하였으며 주변 세력에 의한 외침이나 정복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인근의 페르시아나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옛 이라크 지역을 정복하기도 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 세력이 7세기 이 지역을 정복함에 따라 이슬람 세력에 편입되고 8세기 아바스 왕조 시기에 바그다드는 왕국의 수도로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몽골의 칸이 바그다드를 정복하기도 하였지만 오스만 투르크가 강성해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영국의 영향을 받다가 1932년 영국의 신탁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그러나 아직 영국이 배후에 있는 인공국가로서 왕정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아랍 민족은 하나”라고 외치며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마침내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아랍연합공화국으로 합쳐 새롭게 하나의 국가로 탄생하자 이라크에서도 1958년 이에 크게 고무된 청년 장교들이 이집트 나세르의 혁명을 모방하여 왕정을 전복시키고 혁명정권을 출범시켰다.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정치적인 혼란과 쿠데타를 거듭하다 결국 바트당과 아랍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의 정권을 잡게 된다. 바트당은 반제국주의, 아랍 통일 그리고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이라크를 이끌었다.
바트당의 마지막 최고권력자가 사담 후세인이다. 사담 후세인은 집권 후 과거의 영광 재현을 부르짖으며 낙후된 이라크를 아랍 산유국 가운데 군사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은 반대 세력을 무참하게 숙청하고 독재통치의 기반을 닦았다.
미국은 후세인 집권 초기 과거 이라크 친소정권을 전복시키고 집권한 바트당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였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이란이 역내에서 부상하자 이슬람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하는 주변 중동 국가들의 심정적 지원을 업고 역내 세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샤트알아랍강 수로의 영유권을 구실로 사담 후세인은 이란을 공격했다. 이른바 8년 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다.
미국은 이란 혁명의 확산을 막고자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였으며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최신 무기를 지원하였다.
국제 사회의 중재로 지리한 8년 간의 전쟁은 확실한 승자 없이 휴전하게 된다. 전쟁 후 외채 부담과 유가 인하로 인해 경제개발계획이 차질을 빚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1990년, “쿠웨이트는 원래 이라크 바스라 주에 속하는 자국의 영토였고 영국이 석유 이권을 위해 분리 독립 시킨 것은 부당한 처사이며 쿠웨이트가 할당량을 초과 생산하여 원유가를 하락시키는 장본인”이라고 비난하며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이라크에 편입시켰다.
사담 후세인의 반미정책과 군비 확장에 불안을 느끼던 미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사담 후세인과 완전히 등을 돌렸다. 결국 1991년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의해 시작된 걸프전쟁으로 쿠웨이트는 수복이 되고 이라크는 다국적군에 의해 완패하였다.
그러다가 미국의 911테러 이후 이라크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 의해 악의 축으로 규정되고 마침내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을 구실로 2003년 미국과 영국 등이 이라크 공습을 개시하며 이라크 침공 전쟁이 발발하였다.
개전 후 약 두 달 만에 주요 전투가 모두 종료되고 후세인 정권은 미국에 의해 붕괴되고 이라크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이라크에 과도 통치 기간을 거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주권이 이양되었다. 이후 과도 정부를 거쳐 2006년 국민 총선거로 정식 정부가 출범하였다. 사담 후세인은 미군에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고 2006년 사형이 선고되어 처형되었다.
미국은 이라크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식하려 하였지만 중동 아랍지역은 미국이 생각하는 바와 큰 차이가 있었다. 전쟁은 신속하게 끝나고 점령은 하였으되 평화 유지와 정착은 더 어려운 과제였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에서도 정치적 출구 없이 중동 사막 모래의 늪에 빠지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테러와 국내 정파, 종파간 대립으로 아직도 이라크는 정치사회적 안정을 확실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
혼란을 틈타 과격 수니파 무장 세력인 IS(이슬람 국가)가 이라크 내에서 준동하기도 하였다. 후세인 정권은 수니파 이슬람에 기반한 정권이었다.
전체 아랍권에서 수니파가 다수이나, 이라크 남부를 중심으로 원래 이라크에는 시아파가 더 많았다. 과거 소수 수니파 후세인 정권은 시아파 무슬림들을 박해하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이후 선거를 치루자 다수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새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으나 당연하게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과 가까워졌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로 연결되는 시아파 초승달 세력이 이어진 것이다.
이란과 적대 세력이었던 이라크가 무너지고 시아파 초승달이 뜨자 당황한 절대 왕정 국가 사우디아라비아는 직접 이란과 대결하는 양상이 되었다. 이라크는 원래 중동의 중심 국가였던 만큼 이라크의 전후 재건과 향후 전개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느냐에 따라 중동 판세가 크게 변화할 것이다.
시리아에서 전격 철군을 결정했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라크의 미군 기지를 깜짝 방문하여 이라크 내 주둔 미군의 철수는 없다고 공언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이라크는 과연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기선완 교수는
1981년 연세의대 입학하여 격동의 80년대를 대학에서 보내고 1987년 연세의대를 졸업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레지턴트를 마치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이후 건양대학병원 신설 초기부터 10년 간 근무한 후 인천성모병원을 거쳐 가톨릭관동대학 국제성모병원 개원에 크게 기여했다. 지역사회 정신보건과 중독정신의학이 그의 전공 분야이다. 최근 특이하게 2년 간 아랍에미레이트에서 한국 의료의 해외 진출을 위해 애쓰다가 귀국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