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측이 차량 화재와 관련한 결함을 은폐했다는 정부 판단이 나오면서 징벌적 손해배상 및 집단소송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태,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태 등 잇따른 피해에도 한국 소비자들은 여전히 ‘호갱(호구 고객)’ 신세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제도 미비로 제대로 보상을 받기도 어렵고, 개별 소송에 나선 소비자들의 비용 부담도 큰 실정이다.
25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국회에는 ‘징벌적 배상에 관한 법률안’이 4건 계류돼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을 계기로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 소위원회에 머물러 있다. 자동차에 한해 손해배상 책임을 강화하는 자동차관리법 일부개정안 역시 계류 중이다. 법무부가 의원입법을 통해 발의한 집단소송법 개정안 처리도 지지부진하다.
법안 통과가 늦어지면서 ‘국내 소비자들이 봉’이라는 불만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엄격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존재하는 미국 등에서는 기업들이 소송에 돌입하기 전 서둘러 피해자들과 적극 합의에 나선다. 소송에 가면 엄청난 배상액을 물게 될 수 있으니 최대한 소비자 요구에 맞춰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피해가 명백하더라도 기업들이 ‘소송까지 가보자’며 배짱을 부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실제 폭스바겐은 2015년 배출가스 조작 사태 때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1인당 최대 1100만원을 배상했었다. 반면 국내 소비자들은 100만원짜리 쿠폰을 받았다. 결국 소비자들은 별도 소송 제기에 나섰고, 이런 소송이 법원에 수십 건 계류돼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가해자가 피해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배상토록 하는 제도다. 집단소송 제도와 함께 쓰일 때 더 위력이 커진다. 집단소송은 대표자가 소송을 내면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재판 결과가 동시 적용된다. 국내에서는 집단소송이라는 말이 폭넓게 쓰이지만 사실 집단소송보다는 ‘공동소송’이 정확하다. 미국에서는 소비자 피해 등 광범위한 집단소송이 가능하지만 한국에서는 증권 분야에서만 가능하다.
국내에 관련 제도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게 법조계의 인식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2011년 부당한 하도급 거래를 처벌하기 위해 도입됐다. 개인정보 유출, 기간제 근로자 차별 등의 경우에도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릴 수 있다.
지난 4월에는 제조물 책임법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이 시행됐다. 하지만 제조물로 인해 생명·신체에 중대한 손해를 입힌 경우에만 가능하다. BMW 사태의 경우 차량이 불타 차량 손해가 난 것이라 현행법상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이 아니라는 허점이 있다. 또 현재 제도는 피해액의 3배까지로 액수에 제한을 두고 있다. 사실상 ‘무늬만 징벌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서 옥시는 최고 10억원의 보상액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미국이었다면 최고 100억원은 받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1994년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쏟아 화상을 입은 할머니는 법원 소송을 통해 맥도날드로부터 32억원을 배상받았다.
집단소송 역시 현재 분식회계 등 증권 분야에만 허용되는 등 한계가 뚜렷하다. 법무부는 집단소송 가능 분야를 제조물 책임, 식품 안전 등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집단소송법 개정안을 의원 입법을 통해 발의한 상태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관련법들이 통과될 경우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어 원안대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