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인 르 피가로지는 아니 에르노를 두고 ‘공식적인 작가’라는 표현을 썼다. 프랑스에서 가장 보수적인 언론이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작가에게 보내는 이 찬사는 오늘날 프랑스 문단에서의 그녀의 위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하여 1984년 ‘아버지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세월’로 마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램 독자상을 수상한 이후 현재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아니 에르노는 그의 작품들을 엮은 ‘삶을 쓰다’로 생존 작가 중 유일하게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되기도 했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 속에는 부모와 청소년기, 낙태와 결혼, 어머니의 알츠하이머 투병과 자신의 유방암 투병, 이혼과 열애, 작가 개인의 역사이자, ‘나’라는 화자의 옷을 입은 공동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니 에르노를 가장 동시대적인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기억을 통해 공동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그녀의 작품 세계가 이번에는 ‘사진’이라는 장르와 만났다. 남녀가 사랑을 나눈 후 풍경을 기록한 글로 읽는 사진. 아니 에르노와 그녀의 애인, 마크 마리, 두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사진의 용도’는 날카롭고 담담하게 욕망과 죽음을 고찰해 나가는 작가만의 ‘기억의 용도’를 보여 주는 글이기도 하다.
단순한 열정으로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작가의 또 다른 사랑 이야기와 유방암의 투병기를 아니 에르노 식의 날카롭고 섬세한 문체로 적은 이 기록은 생과 죽음, 사랑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흘려보내지 않는, 삶이 글이 되고 글이 다시 삶이 되는 소중한 순간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사진의 용도’를 옮긴 신유진 작가는 파리 8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고,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번역가, 통역가로 활동해 왔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사진과 글의 만남을 소설로 엮은 ‘여름의 끝, 사물들’, 프랑스에서 보낸 15년 동안의 시간과 기억을 담은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이 있으며, 현재 아니 에르노의 또 다른 작품들을 번역 중에 있다.
이 신예 작가가 쌓아 올리는 징검다리는 반세기 동안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73세의 대가를 위한 소박한 마중이자, 내일의 교량을 위한 약속일 것이다.
디지털기획팀 이세연 lovo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