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수행비서 김지은씨와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전부 무죄가 선고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1일 항소심에 돌입했다. 김씨 진술의 신빙성 입증과 ‘위력’에 대한 법리를 놓고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전망이다.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판사 홍동기)는 피감독자 간음 등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의 항소심 1회 공판기일을 열었다. 검사와 변호인 양측이 항소 이유에 대한 의견을 진술했지만 안 전 지사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안 전 지사는 지난해 7월부터 지난 2월까지 러시아·스위스·서울 등 출장지 호텔에서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김씨를 4회 간음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관용 차량에서 업무상 위력으로 김씨를 1회 추행한 혐의, KTX와 식당 등에서 김씨를 5회 강제추행한 혐의도 받는다.
1심은 공소제기된 10개의 범죄사실에 대해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도지사와 비서 간의 관계에는 ‘위력’이 존재한다고 보면서도 위력의 존재만으로 김씨의 자유의사가 억압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또 카카오톡과 텔레그램 대화 내용, 지인들의 증언, 사건 당시 정황에 비춰봤을 때 김씨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봤다.
1심 재판부는 명시적 동의를 얻지 않은 성범죄를 처벌할 수 없는 현행법의 한계도 언급했다. 재판부는 “‘No means No Rule’이나 ‘Yes Means Yes Rule’이 입법화되지 않은 현행 성범죄 처벌법하에서는 피고인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날 검찰은 1심 판단이 법리를 잘못 해석했고,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위력’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행사되지는 않았다는 1심 판단 취지에 대해 “대법원이 일관되게 유지해오고 있는 법리를 부당하게 축소해 봤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1998년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사건에서 “위력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폭행·협박뿐 아니라 사회·경제·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판시했다. 또 “위력 행위 자체가 추행 행위라고 인정되는 경우도 포함되고 이 경우 위력은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 전 지사 변호인 측은 “1심이 위력이 존재한다고 판단한 것은 수행비서와 도지사라는 업무상 수직적 권력 관계가 존재했다는 뜻”이라며 “업무상 위력이 존재했을지 모르나 간음과 추행의 수단이 된 것은 아니다”고 맞섰다. 김씨 진술 신빙성에 대해서도 “이 사건의 쟁점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여부인데 1심은 신빙성이 없다고 봤다”며 “이 또한 정당한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1심 판단이 대법원 판례보다 위력을 좁게 해석하고 최근 성 관련 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대법원의 태도와 상반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는 지난달 23일 항소심 재판부에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의견서에서 “사회·경제·정치적 지위 등 무형의 위력은 ‘위력행사 행위’가 없더라도 ‘위력’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며 “1심 판단은 ‘위력의 행사’ 판단에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앞서 같은 달 21일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도 기자회견을 열고 “존재만 하는 위력은 없다”며 “1심 판결은 권력 관계를 이용한 성폭력을 고발한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날 공동대책위 30여명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인 오전 9시 서울 서초구 법원 청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후 청사 안으로 들어가 침묵시위를 지속했다. 오전 10시쯤 안 전 지사가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올라가자 “안희정을 구속하라” “안희정은 유죄다”를 외치다 경찰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대법원이 최근 성 관련 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판례를 내놓으면서 이러한 경향이 항소심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성 비위 문제로 징계처분을 받은 대학교수 A씨 사건에서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판결들이 잇따랐다. 대법원 판결 이후 지난달 28일까지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판결은 18건인 것으로 확인됐다.(국민일보 11월 28일자 참조)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