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 제천 화재참사 유족의 1년

입력 2018-12-20 07:00 수정 2018-12-20 10:19
류건덕씨가 12일 재직 중인 강원도 정선의 한 고등학교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류씨는 지난해 12월 21일 충북 제천 하소동 노블휘트니스앤스파 스포츠센터 화재참사로 아내 이항자씨를 잃은 유족단체의 공동대표다.

그날 오후 4시50분. 강원도 영월의 한 고등학교에 있던 교감 류건덕씨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요일 오후 일과를 소화하고 있었다. 교무실이 술렁거렸다. 바로 옆 충북 제천 시내에서 큰불이 났다고 했다. 화재 지점은 제천 하소동 노블휘트니스앤스파 스포츠센터. 아내가 회원으로 등록된 곳이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내에게 모바일 메시지를 보냈다. 아내는 메시지를 읽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받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곧 뛰어나가 승용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마자 최고 속력으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영월에서 제천까지 산악지형 국도 약 30㎞ 거리를 10여분 만에 주파했다.

도착 시간은 오후 5시. 아내와 함께 주말마다 다녔던 교회의 목사·성도들이 화재 현장에 있었다. 동네 이웃들도 보였다. 건물은 검은 연기를 하늘로 뿜고 있었다. 류씨는 소방관의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망·부상자들을 일일이 살피며 아내를 찾았다. 아내는 없었다.

지난해 12월 21일의 일이다. 류씨의 아내 이항자씨는 교회 봉사활동을 마치고 이 스포츠센터 2층 목욕탕에서 지친 몸을 녹였다. 불이 났고, 그 안에 갇혔다. 열리지 않은 목욕탕 자동문 앞에서 다른 희생자 9명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류씨는 그날 밤 11시50분 화재 지점 인근 병원 영안실에서 아내의 시신을 확인했다.

작별인사를 나눌 잠깐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씨가 유품으로 남긴 것은 검게 그을린 가방 하나. 화재 현장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백설기 두 개가 이 가방 안에 있었다. 류씨가 유독 즐겨 먹던 떡이다. 이씨는 봉사활동 중 받은 백설기를 남편의 몫까지 챙겼다. 백설기를 유품으로 받은 류씨는 그제야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씨의 첫 기일을 열흘여 앞둔 지난 12일, 류씨가 일하는 강원도 정선의 고등학교를 찾았다. 아내를 떠나보낸 그 계절이 다시 찾아와 정선을 하얗게 덮었다. 류씨는 사고 이후 유족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아 1년간 활동했다. 아내를 잃은 아픔을 추스를 틈도 없었다. 류씨는 “1년간 아파할 시간도 없었다”고 말했다.

-1년을 어떻게 지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 삶이 없었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질타와 원망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인들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왜 돌아가셨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죠. 지난 1년은 진실규명에 모든 시간을 쏟았습니다. 고인과 유족을 위해, 다시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 화재 현장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1년간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아내를 잃었지만, 하나뿐인 딸은 엄마를 잃었습니다. 그 빈자리를 느낀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아내를 보낸 후에 요리책을 많이 봤습니다. 아내가 시집 간 딸에게 반찬을 자주 가져다 줬거든요. 엄마가 해줬던 걸 제가 그대로 해주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솜씨라 관사에서 미리 책을 보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재료를 그대로 사서 집에 들고 가 반찬을 해 딸에게 보냈습니다. 안 해본 요리가 없어요. 하루는 아내가 특히 잘했던 오이소박이를 해다 줬는데 딸이 ‘엄마보다 잘했다’고 하더군요.

-고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참 착한 사람이었죠. 1984년, 신출내기 교사 시절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매일 술에 빠져 살았죠.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술에 취한 밤 무작정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너무나 따뜻하게 맞아주셨어요. 그렇게 교회를 다니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는 목사님의 딸이었습니다. 저와 다르게 너무 고귀한 존재로 느껴졌어요. 다가가지는 못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짝사랑했죠. 그러다 교회 청년부 마니또 게임에서 아내와 서로 비밀친구로 연결됐어요. 같이 만나 밥을 먹다 제가 고백했고 승낙을 받았습니다.

고 이항자씨의 후원으로 해외 빈민 주거구제 자선재단이 지은 집. 류건덕씨 제공

-이후의 삶은 어땠습니까.

이듬해(1985년) 겨울에 제가 청혼하고 결혼했어요. 아내와 산 뒤부터 저는 빗나가지 않고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내는 시아버지, 친정 부모님을 모두 모셨어요. 평생 남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양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 한다는 말이 ‘이제 진짜 남을 위해 살아봐야겠다’였습니다. 그 후에 교회 봉사활동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저도 텃밭 농사로 작물을 재배해 아내의 반찬 봉사에 보탰죠. 아내는 필리핀 등 해외로 나가서도 봉사했습니다.

아내의 사후에 알게 된 일이 있습니다. 아내가 해외 빈민들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해, 저 몰래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지인의 꽃집에서 일하고 받은 돈을 전부 거기(자선단체)에 보냈습니다. 알고 보니 벌써 2채의 집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통장에 더 기부하기 위해 모인 돈이 있었습니다. 총 10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아내의 뜻을 이어 제가 말레이시아에 집 3채를 지었습니다. 아내의 바람처럼 앞으로 5채를 더 지으려 합니다. 그게 살아남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사고 당일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제 건강이 좀 안 좋았습니다. 영월에서 근무한 뒤 학교 관사에서 혼자 생활했는데, 그 주에는 아내가 제천에서 올라왔습니다. 월요일부터 관사에서 함께 생활했죠. 그런데 사고 당일인 목요일 아침에 교회에 가서 봉사한다고 제천에 가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출근길에 아내를 버스정류장까지 태워줬습니다. 그날따라 제가 ‘안 가면 안 되겠냐’는 말도 했죠. 아내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반찬을 기다리는 어려운 이웃들이 많다며 제천으로 갔습니다. 아내가 차에서 내리고 잠시 뒤 ‘오늘도 좋은 하루…’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게 아내가 저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고인의 부고는 어떻게 받았습니까.

사망자가 하나둘 제천 시내 병원 영안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온 병원을 돌아다녀도 아내가 있다는 곳이 없는 겁니다. 자정이 거의 돼서야 한 병원에서 아내가 발견됐습니다. 알고 보니 아내가 출입문을 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지문이 지워져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던 겁니다. 목욕탕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살아보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 걸까요. 영안실에서 아내 얼굴을 확인했는데 화재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했습니다. 콧속만 까맣더군요. 그걸 보니 사람이 정말 미치는 겁니다. 조금만 더 빨리 구했더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충북 제천 하소동 스포츠센터 건물이 지난 12일 밤 폐쇄돼 있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1·2층은 철제 외벽으로 가려졌다.

-구조 상황을 놓고 유족과 소방당국 사이에 여러 쟁점이 있습니다.

소방관에게 왜 책임을 묻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당시 소방관들이 구조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일선 소방관들을 폄훼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저희가 책임을 묻는 건 당시 구조 현장을 통솔했던 지휘관 2명입니다. 구조대원들은 지휘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휘관은 2층에 구조를 필요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구조대원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건물 안에 있는 데 1층에 세워진 차에 붙은 불을 끄고 있었어요. 사람이 갇혀있던 2층 여탕 쪽에 유리창을 깨라는 지시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소방청은 소방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지휘관들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업무상 과실치사를 물을 수 없다며 지휘관들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어요. 사실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한 집안의 아버지입니다. 고인을 놓고 소송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또 비슷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내 아내와 같은 희생자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저는 은퇴를 몇 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은퇴하면 아내와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 가꾸며 사는 게 제 계획이었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유족 대표로서)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안전 분야에서 활동해보고 싶습니다. 안전 교육용 책자를 내거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아내처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입니다. 고인들의 1주기가 오기 전에 모든 유족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유족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류씨와의 인터뷰 닷새 뒤인 지난 17일, 유족과 충북도의 협상은 결렬됐다. 류씨는 19일 전화통화에서 “모든 것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족은 참사 1주기인 오는 21일 제천 용두동 하소생활체육공원에서 추도식을 가질 예정이다.

정선·제천=글·사진 김철오 강문정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