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100일 앞으로 다가온 브렉시트(3월 29일 자정 발효되는 영국의 EU 탈퇴)를 앞두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나섰다. 내년 1월 셋째주 예정된 하원의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에서 통과될지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테리사 메이 내각은 아무런 합의 없이 EU를 떠나는 노딜 디렉시트를 상정하고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을 가동하기로 결정했다.
가디언 등 영국 언론은 18일(현지시간) 테리사 메이 총리 주재로 열린 내각회의에서 20억 파운드(약 2조8700억원) 규모의 ‘컨틴전시 펀드(비상기금)’를 내무부, 환경부, 식품부 등 각 부처에 배정했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3500여명 규모의 군 병력을 비상 대기토록 결정했다. 아울러 민간 기업들에도 노딜 브렉시트 대비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100쪽 분량의 지침서를 작성, 14만여 기업에 이메일로 배포할 예정이다.
영국 재무부는 지난해 예산안에서 노딜 브렉시트에 대비하기 위해 30억파운드(약 4조3000억원) 상당의 예산을 별도로 책정한 바 있다. 필립 해먼드 재무장관은 긴급 자금 가운데 일부는 식료품·의약품 등의 공급을 원활하게 위해 세관 직원 3000명을 추가 채용하고 수송선을 예약하는데도 쓰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EU 집행위원회도 19일 비상조치 관련 14개 사항을 발표하는 등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EU가 마련한 대책안에는 브렉시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국경의 대기행렬, 비행일정 축소, 금융시장 혼란 등에 대한 경감 방안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과 EU가 비상대책을 마련하는 등 노딜 브렉시트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영국 기업계 5대 대표단체는 “노딜만은 막아달라”며 정부와 의회에 호소하고 나섰다. 영국산업연맹(CBI)과 영국상공회의소, 소기업연맹(FSB) 등은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정치인들이 파벌 싸움에 몰두하는 동안 업계는 공포 속에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면서 “수많은 기업이 짧은 시간 내에 노딜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혼란이 커지면서 정치권에서는 2차 국민투표를 원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메이 총리의 합의안과 노딜 브렉시트, EU 잔류 등 세 선택지를 놓고 투표하자는 것이다. 앞서 유럽사법재판소(ECJ)는 영국이 일방적으로 브렉시트 취소 선언을 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리며 잔류파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 바 있다.
하지만 집권 보수당은 물론이고 제1야당인 노동당도 2차 국민투표에 미온적이다. 합법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브렉시트까지 100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절차 논란이 발생해 영국 민주주의의 근본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총수는 전날 메이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메이 총리는 구속력이 없는 노동당의 불신임안 제출을 정치적 쇼로 일축하면서 내각 사퇴로 이어질 수 있는 법적 구속력 있는 불신임안을 정식 제출하라고 맞섰다.
노동당은 메이 내각이 ‘정치적 쇼’를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노브렉시트에 대한 공포를 키워 의회가 메이 총리의 합의안을 비준하도록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당 내 메이 반대파도 노동당과 비슷한 입장이지만 노동당의 불신임안에는 분명히 반대를 표하고 있다. 자칫 조기 총선으로 이어져 정권을 내놓을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