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렌 로페테기가 레알 마드리드 사령탑에서 경질된 지 50여 일이 다 됐다.
후임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는 산티아고 솔라리. 그의 지도자 경력은 레알 유스팀과 B팀 격인 카스티야를 이끈 것이 전부였다. 1군 팀을 경험한 적 조차 없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솔라리를 사령탑에 앉힌 구단 수뇌부의 선택엔 많은 의문부호가 뒤따랐다. 지난 시즌 세군다 디비시온 B(3부 리그)에서 8위에 그쳤으나 이번 시즌만큼은 팀의 선전을 이끈 데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현재까지 솔라리의 레알은 성공적이다. 그가 지휘봉을 잡은 이후 레알의 성적은 8승 2패. 과거와 같은 기세는 아니지만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 어느 정도 반등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4위권에 안착했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조 1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로페테기 체제와 비교했을 때 솔라리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유망주 선수들의 대거 활용이다. 많은 백업 선수들과 유망주들이 솔라리호에서 중심축으로 좀 더 다가섰다.
지난 13일 유럽 챔피언스리그 CSKA 모스크바전 선발 명단을 살펴보면 다수의 신예 선수들 이름이 올라있었다. 확실한 붙박이 주전은 골키퍼 티보 쿠르투아와 카림 벤제마, 마르셀루뿐. 최근 솔라리 체제에서 주역으로 급부상하는 마르코스 요렌테를 비롯해 비니시우스 주니오르, 하비 산체스와 페데리코 발베르데 등이 그들이다. 이날 경기에서 패한다 하더라도 조 1위로 16강 진출이 가능했던 낙관적인 상황 덕택이었다.
이처럼 솔라리 감독은 기존에 기회를 잡지 못했던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있다. 2군 격인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를 이끌었던 경험이 그 바탕이 된 듯하다. 카스티야에서 지적받았던 얇은 전술 폭을 유망주들 활용으로 극복했다.
마르코스 요렌테, 카세미루를 지우다
가장 눈에 띄는 장족의 발전을 한 선수는 요렌테다. 요렌테는 솔라리 감독체제서 치른 10경기 중 5경기에 선발로 나서고 있다. 특히 최근 입지가 더욱 상승했다. 레알의 이달 4번의 경기에서 지난 10일 SD 우에스카전을 제외하고 요렌테가 모두 선발 명단에 이름이 올렸다. 솔라리 감독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모양이다. 토니 크로스와 루카 모드리치 아래에 위치해 든든한 홀딩 미드필더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나초 페르난데스와 카세미루의 부상이 기회를 가져다 줬다. 나초는 오른쪽 무릎 인대 부상, 카세미루는 오른쪽 발목 부상으로 올 한해는 더 볼 수 없다. 미드필더진에서 밸런스를 잡아줄 수 있는 두 선수가 모두 이탈하며 험로가 예상됐으나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요렌테의 활약 덕이다.
요렌테는 안정적인 빌드업 능력을 바탕으로 중원을 장악하며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맡고 있다. 그가 출전한 경기에서 가장 많은 패스를 기록한 선수 역시 요렌테였다. 평균 경기당 5개의 태클과 2개의 인터셉트를 하고 있다. 상대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다는 뜻이다. 요렌테의 활약에 솔라리 감독 역시 함박웃음을 지었다. 솔라리 감독은 지난 2일 발렌시아와의 경기(2대 0승)가 끝난 후 이스코 자리에 출전한 요렌테에게 “환상적이다. 강팀을 상대로 어떻게 경기를 운영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며 공개적으로 칭찬을 건넸다.
요렌테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가 수비형 미드필더임에도 기본적인 임무인 지역방어와 함께 공격적인 기여가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다. 뛰어난 인터셉트와 태클 능력으로 빠르게 볼을 탈취해 전방으로 전달했다. 빠른 공수 전환이 중요시되는 역습에 최적화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카세미루의 최고 장기였던 포백 보호 역시 훌륭했다. 요렌테의 압박 덕에 레알을 상대하는 팀들은 역습 속도가 늦춰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뒤를 잇는 포백 수비수들은 돌아올 공간이 생겨 빠르게 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본인이 롤 모델로 꼽고 있는 사비 알론소와 플레이가 상당히 닮아있다. 창의적인 시야를 바탕으로 볼을 넓게 뿌리는 것을 좋아하며 포백 앞에서 위치하는 것 역시 스타일이 비슷하다. 왜소한 체격으로 신체조건이 우수하지 않아 공중볼 다툼에 약점을 보인다는 것 역시 그렇다.
요렌테의 집안은 레알 그 자체다. 증조부인 프란시스코 헨토는 현재 구단의 명예 회장이자 유럽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을 무려 6차례나 들어 올린 전설이다. 아버지인 프란시스코 요렌테도, 외할아버지인 라몬 그로소도 모두 레알에서 활약했다. 이젠 요렌테의 차례다.
요렌테는 이젠 뒤를 잇는 2옵션이 아닌 카세미루의 분명한 경쟁자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지금과 같은 상승세를 이어간다면 모드리치의 대체자를 구해야 하는 레알의 숙제도 한결 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옵션들의 성장
루카스 바스케스 역시 솔라리 체제에서 입지가 뒤바뀐 선수다. 그간 가레스 베일과 마르코 아센시오에 밀려 존재감이 가려져 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솔라리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치른 지난 10경기 중 8경기(선발 7경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케스가 결장한 두 경기는 지난달 24일 SD 에이바르전과 13일 모스크바전. 레알은 이 경기에서 모두 0대 3으로 패했다. 바스케스가 출전한 전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는 뜻이다.
바스케스의 주포지션은 오른쪽 측면 공격. 하지만 오른쪽 풀백부터 중앙 미드필더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매우 보기 드문 유형의 선수다. 측면 공격수치고 발이 빠르지는 않지만 날카로운 드리블 능력과 폭넓은 활동량을 가지고 있다. 직선적이고 속도감 있는 공격을 선호하는 솔라리 감독은 이스코와 아센시오보단 바스케스에게 좀 더 신뢰를 보내고 있다. 감독이 요구하는 다양한 전술과 시스템에서 위치를 가리지 않고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바스케스의 최고 장점이다.
2군에서 합류한 하비 산체스와 세르히오 레길론 역시 출전시간을 점차 늘려가고 있다. 다니 세바요스와 페데리코 발베르데, 헤수스 바예호 역시 마찬가지다. 비니시우스도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레알의 공격루트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이 아직 눈에 띄는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솔라리 감독은 이들에게 성장할 수 있는 경험과 시간을 주고 있다. 전임 감독인 지단의 로테이션 정책보다 훨씬 파격적이다.
레알은 올 한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일정을 모두 마친 후 클럽 월드컵을 준비 중이다. 지난 시즌 유럽 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클럽 월드컵에 참가한다. 그에 따라 3주간의 짧은 리그 휴식기가 있을 예정이다. 이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신성들의 기회기도 하다.
레알은 그동안 ‘갈락티코’로 대표되는 영입 정책을 펴왔다. 최정상급 스타들을 영입해 팀의 명성을 높이고 화려한 전력을 구축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흐름은 그렇지 않다. 어리고 재능 있는 스페인 출신 선수들을 육성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구단 유소년 아카데미 출신 선수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매년 가속화되는 세계 축구 시장 흐름 속에서 막대한 투자에 한발 앞서 구단 내 유소년들에게 시선을 돌린 것이다.
백업 선수들의 성장으로 레알 내에서의 주전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솔라리의 지난 50일이 만들어낸 가장 큰 변화다. 어쩌면 레알 수뇌부들이 2군 감독 출신인 솔라리에게 가장 기대했던 부분일지도 모른다.
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 전광판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태화 기자가 함성소리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전하는 스포츠 연재입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