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취임 100일을 국회 본회의장 앞 찬 대리석 바닥에서 맞게 됐다. 거대양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예산안과 선거제도 개혁을 별개 처리하기로 합의하며 당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당의 핵심목표인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은 요원해졌고, 당내에선 해묵은 노선 갈등 문제가 재점화될 조짐이 감지된다.
손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9일 선거제 개편을 연계하지 않은 민주당과 한국당의 예산안 합의를 ‘담합’으로 규정하고 나흘째 무기한 단식 농성을 이어갔다.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군소 3당 소속 의원, 당직자, 보좌진도 함께 규탄집회에 나섰다. 손 대표는 이날 예정돼 있던 취임 100일 기념행사 일정도 취소했다.
한국정치사에서 야당지도자의 단식 투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손 대표처럼 70대 고령에 단식을 한 사례는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3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 투쟁했을 때 나이가 56세였다. 1990년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방자치제 도입을 요구하며 단식했을 때 나이는 64세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었던 지난 2014년 8월 세월호특별법의 국회통과를 촉구하며 열흘간 단식했을 때 나이도 61세였다.
손 대표가 만 71세 나이로 단식에 돌입하면서 정치인으로서는 역대 최고령 단식농성자로 남게 됐다.
고령의 손 대표가 당 관계자들과 소속 의원들의 만류에도 단식에 나서면서 당내에서는 “빨리 출구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손 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확실히 채택하겠다는 정부·여당과 야당의 합의가 있을 때까지 단식을 이어가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 당 관계자는 “손 대표가 별도의 출구전략 없이 비장한 각오로 단식농성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민주당과 한국당이 내가 단식하는 뜻을 잘 알 것”이라며 거대양당의 입장 변화가 있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손 대표의 의중과 달리 군소 3당이 마련한 선거제도 개혁 합의안을 두고 민주당과 한국당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어 협상 자체가 교착 상태가 빠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3당의 합의안에 포함된 도농복합형 선거구제를 두고 거대양당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다.
도시 지역은 지역구당 2~4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인구 밀도가 낮은 농촌 지역은 지역구당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이 안에 대해 한국당은 적극 찬성하고 있지만 민주당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소선거구제 하에서 2등은 낙선이나 중대선거구제에서는 2~3등도 당선될 수 있다. 수도권 등 도시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는 민주당 입장에서는 한국당에 텃밭을 뺏기는 꼴이다.
묵혀둔 당 정체성 문제가 불거질 조짐도 보인다. 당내 바른정당계 의원들의 좌장격인 유승민 의원은 지난달 말 연세대·이화여대 강연에서 당의 보수 정체성에 대해 “언젠가는 분명히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 데 이어 지난 7일 서울대 강연에서도 당의 노선 문제를 제기했다.
유 의원은 손 대표를 겨냥해 “제가 생각하는 ‘개혁 보수’와 바른미래당이 가는 길이 초점이랄까 방향이 조금 맞지 않다는 괴로움이 있다”며 “당이 어디로 가는지 밝히지도 않은 채 한국당을 대체하겠다고 하면 안 통한다”고 비판했다. 예산안과 선거제 개혁 동시 처리를 주장해온 지도부의 입장에 대해서도 “저는 예산안은 예산안대로 심의하는 게 맞지 않나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상욱 의원도 손 대표가 단식 결단을 내린 지난 6일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서 “민생정당을 표방하는 우리 당이 예산안을 선거제 개편과 연계해 투쟁한다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며 “예산 투쟁에 집중해 일자리 예산, 남북기금예산 등 우리가 삭감하려 했던 예산을 더 챙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예산안 연계 투쟁으로) 국민을 패싱했고, 국회에서는 (증액심사에 참여하지 못하며) 패싱당했다”고 덧붙였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