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유망한 20대 유학생으로 일본 제국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하다 수감됐다. 감리교인으로 일본에서 다시 미국 웨슬리안대로 유학길에 올랐고, 뉴욕 컬럼비아대 대학원 재학 중엔 3·1운동 정신을 담아 ‘삼일신보’를 창간해 언론 활동을 했다.
1931년 워싱턴 아메리칸대에서 ‘한국의 농촌경제’를 주제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식민지 조국으로 귀환,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생애 두 번째 피검된 후 해방을 맞았다. 기독인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상산(常山) 김도연(1894~1967) 박사 이야기다.
김 박사는 내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2·8 독립선언의 주역이었다. 그와 최팔용 백관수 김상덕 송계백 이광수 등 도쿄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그해 2월 8일 도쿄조선YMCA(Y)회관에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선언서’ ‘결의문’ 등을 발표했다.
경기도 양천군 염창리(현 서울 염창동) 부농의 아들로 게이오대 이재학부(경제학과)에 유학 중이던 청년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김도연 등 9명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재판에 넘겨져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각각 7~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20대 청년들이 제국의 심장부에서 주도한 2·8 독립선언 소식은 곧바로 한반도로 전해져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연세대 강사 홍승표씨는 “열강 가운데 일본은 유일하게 천황을 숭배하는 비(非)서구 침략국이었고, 한국은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된 상황이었다”면서 “당시 교회에 나가는 것은 성경을 통해 자유 평등 정의 인권 등을 배우는 일이었으며 이는 일제로부터 민족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대안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고 밝혔다.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도쿄조선Y 역시 가입 조건이 기독인이었다. 교회에 출석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김 박사의 손자인 김민희 건국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6일 “상산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과 같이 변하지 않는 산처럼 독립정신을 지키고자 상산이란 호를 쓰셨다”고 말했다. 이어 “상산 어른은 광복 후 정치활동을 하면서 특정 교회에 적을 두시지 않았지만 후손들은 교파와 상관없이 장로교인 덕수교회와 성결교인 아현교회에 출석했다”고 회고했다.
서울Y는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Y회관에서 세미나를 열고 홍씨의 발제를 중심으로 김 박사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했다. 서울Y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위원회’를 중심으로 재일본한국Y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2·8 독립선언 인물열전 강좌’의 일환이었다.
서울Y는 오는 11일 2·8 독립선언 이후 언론인의 길을 걷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백관수 선생을 조명함으로써 인물열전 세미나를 마무리한다. 주건일 서울Y 시민사회부 팀장은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청년들의 독립정신을 오늘날 시민사회 맥락에 맞게 새롭게 조명하는 선언문을 기획 중”이라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