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다”
막판 예산안 심의가 한창이던 6일 오후,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협상 테이블을 먼저 박차고 나왔다. 이어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단히 참담하다”며 말을 시작했다. “양당의 기득권 욕심이 정치개혁의 꿈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민주당 스스로 촛불 혁명의 실패를 선언한 것이다” 등 거친 표현을 쏟아 냈다. 예산안 심의 협상 과정에서 ‘선거제도 개혁’ 관련한 합의도 포함시켜줄 것을 줄곧 주장했지만,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다.
“잠정 합의를 이뤘다”
같은 시각,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동시에 협상장의 문을 열고 나왔다. 각 당이 의원총회를 열어 잠정 합의문을 보고한 뒤 의원들로부터 동의를 받기로 했다. 비공개 의총에서 두 당 모두 만장일치로 잠정 합의문을 추인했다. 이어 두 원내대표가 다시 마나 합의문을 전격 공개했다.
더불어한국당 vs 예산 볼모
선거제도 개혁을 예산안 심의와 연계 처리하려던 야 3당은 협상이 최종 결렬되자 일제히 두 당을 맹렬히 비난하는 논평을 쏟아냈다. 민주평화당은 “자유한국당과 짬짜미가 된 더불어한국당”이라고 비난했고, 정의당은 “기득권 정치에 배불러터진 기득권 양당”이라고 말했다.
반면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예산안을 볼모로 한 선거제도 개혁은 국민 동의를 얻기 힘들다”며 “예산안과 연계하지 않는다는 당의 방침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과 한국당만 내년도 470조5000억원 규모의 예산안을 두고 이견을 좁혔다. 야 3당은 예산 심의에서도 빠졌고, 선거제도 개혁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바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손 대표는 “제 나이가 70이 넘었다”며 “이제 목숨을 바칠 때가 됐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명분 vs 명분, 실상은 밥그릇 싸움?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양쪽 다 명분은 있다. 예산 심의는 국회가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길어져 예산 심의가 늘어지면, 어쨌든 책임은 여당이 지게 된다. 그렇다고 야 3당이 주장하는 선거제도 개혁도 명분이 밀리진 않는다. 비례성을 높여 유권자의 민심을 그대로 국회에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을 반대할 이는 없다.
하지만 서로가 내세우는 명분의 이면에는 각 당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판단이 쉽지 않다. 문제는 야 3당이 합의문에 넣으려고 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원칙으로 한다’는 문구다. 야 3당이 주장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경우 민주당과 한국당의 의석은 크게 줄고, 야 3당의 의석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 때문에 민주당도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결론을 반드시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못 밖을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각 당이 더 많은 의석수를 갖기 위해 명분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최근에 만난 민주당의 핵심 인사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과연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절대 선(善)’인가”. 그는 이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가치들이 경쟁과 토론을 거쳐 서로 조율되는 것이 선거제도”라면서 “비례성 강화 외에도 비례대표의 전문성, 농촌 지역의 지역대표성 등 고려해야 할 다른 가치도 많다.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논의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판단 미스 vs 절박한 선택?
그런데 야 3당은 합의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꼭 연계처리를 강행해야 했을까.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야 3당의 전략 미스”라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예산 심의 과정에서는 당시 제3당이던 국민의당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당의 지역 기반인 호남 지역은 예산을 많이 따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과 한국당 사이에서 제3당이 실리를 돈독히 챙겼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민주당에서 연계 처리 불가 방침을 분명히 했으면 얼른 전략을 바꿔서 선거제도 개혁 논의를 할 수 있는 다른 공간을 확보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국민의당과 협상을 벌였던 전직 민주당 원내 지도부의 한 의원도 “지난해에는 국민의당이 분명한 캐스팅보터였다”면서 “이번에 선거제도 개혁을 예산과 연계한 것은 잘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산 심의에 적극 참여해 본인들의 생각을 예산에 반영시키고, 선거제도는 선거제도대로 따로 논의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야 3당 소속의 한 관계자는 “어리석었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얘기”라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야 3당이 무리수를 둔 측면도 있다.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면서 “하지만 그러면 소수 정당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예산안과 연계시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또 다른 관계자도 “절박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며 “이 시국만 지나면 거대 양당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불 보듯 뻔하다”고 토로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