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뺏겨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차량이 오가는 차도를 걷는 위험한 상황도 연출했다. 이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포켓몬고 좀비’라는 말까지 붙였다.
1일 tvN에서 방송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속 남자 주인공 현빈도 마찬가지였다. 현빈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대신 화장실만 들락거렸다. 술집이 영업을 끝내자 거액을 주며 영업시간 1시간 연장을 요청했다. 분수대가 있는 광장에와서는 허공을 향해 밤새 무언가를 휘두르다 지쳐 바닥에 쓰러졌다.
2년 전 사람들을 ‘포켓몬고 좀비’로 만들고, 드라마 속 현빈을 이상한 남자로 만든 건 증강현실(AR)이다.
2016년 AR게임 ‘포켓몬고’가 전 세계를 강타했을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유럽 등과 달리 정식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대신 강원도 속초에서 포켓몬고를 할 수 있다는 정보가 공유됐다. 포켓몬고에 열광하는 학생과 직장인은 주말이면 속초로 몰렸다. 스마트폰 속 포켓몬 캐릭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현빈은 AR게임 속 배경인 스페인 그라나다를 찾아 그곳 광장의 분수대 위에 있던 동상과 밤새 칼을 휘두르며 대결을 펼친다. 칼은 그라나다 뒷골목의 술집 화장실에서 획득했다. 가장 낮은 수준의 ‘녹슨 칼’이다.
현빈은 자신의 녹슨 칼보다 우수한 무기로 덤비는 동상에게 번번이 패했고 그때마다 게임의 처음으로 돌아가 술집을 오가며 녹슨 칼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동상과의 대결 과정에서 튀기는 파편이나 술집 화장실에서 얻은 녹슨 칼은 현실 세계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뒤범벅된 AR 게임을 드라마 소재로 끌어왔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5세대(5G) 이동통신이 첫 전파를 쏘던 날이다. 5G는 4G인 LTE보다 20배 빠른 서비스로 고용량 데이터 전송이 필요한 증강현실과 가상현실(VR) 그리고 홀로그램이 가능하다. 5G 서비스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이 드라마 속 게임 역시 상용화될 수 없다.
물론 드라마 내용이 현실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5G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내년 3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KT는 야외에서도 인터넷(IP)TV를 시청할 수 있는 5G 기반 VR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기기와 서비스를 내년 3월 출시하겠다고 했다.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는 가상의 공간에서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대화하며 스포츠·영화·드라마 등 동영상 콘텐츠를 시청하는 ‘옥수수 소셜 VR'을 고도화할 계획이다. LG유플러스도 골프나 프로야구, 아이돌 라이브 등 현재 서비스 중인 콘텐츠에 5G를 덧입힐 예정이다.
드라마는 AR게임의 실용 가능성보다는 AR게임의 발전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빈이 착용한 ‘스마트 콘택트렌즈'는 착용하는 동시에 현실 세계와 가상이 겹쳐져 보이도록 한다. 렌즈를 착용한 현빈이 광장에서 기마병을 보고 술집 화장실에서 무기를 찾을 수 있지만 이를 착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현빈이 술 취한 사람쯤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술이다.
포켓몬고를 할 때 캐릭터를 찾기 위해 스마트폰만 보다가 각종 사고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기대되는 기술이다.
AR의 또 다른 가능성도 제시했다. 현빈은 드라마 속 게임을 ‘100조원’ 짜리라고 평가했다. 과거 사람들이 알함브라 궁전을 보기 위해 그라나다를 찾았다면 앞으로는 이 게임 때문에 그라나다를 찾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게임의 첫 시작이었던 그라나다를 전 세계 게임 사용자들이 성지로 여길 게 뻔하다는 것이다.
이미 포켓몬고도 이 같은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속초를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서울~속초 간 고속버스는 2배로 증차했고 해당 지역 지자체장들은 관광 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