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미쓰비시 중공업, 강제징용 배상해야… “늦었지만 상식의 승리”

입력 2018-11-29 15:18 수정 2018-11-29 16:12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손해배상청구소송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소감을 말하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뉴시스

1944년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한 청춘들이 74년을 싸운 끝에 마침내 억울함을 풀게 됐다. 지난달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본 기업 측 배상 책임이 확정된 후 동일 취지의 확정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29일 양금덕(87) 할머니 등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했다. 같은 시각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도 정창희(95) 할아버지 등 강제징용 피해자 6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를 확정했다.

특히 여자근로정신대 관련 소송은 대법원의 첫 판단으로 2012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국내 소송을 시작한 지 6년여 만에 나온 결론이다. 강제징용 피해 할아버지들은 18년 만에 확정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원고가 낸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위자료청구권”이라며 “한·일청구권 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944년 9~10월 일본 히로시마 구 미쓰비시중공업 기계제작소와 조선소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한 정창희 할아버지 등 6명은 2000년 5월 강제징용으로 인한 손해배상금과 지급받지 못한 임금을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7년 만인 2007년 2월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 완성으로 소멸했다”며 배상책임을 부정했다. 이듬해 2심서 내린 판단도 같았다. 4년 뒤인 2012년 5월 대법원이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주장은 신의 성실의 원칙에 반한다”며 “2심 재판을 다시 진행하라”고 요구했다. 2013년 7월 다시 열린 2심에서 미쓰비시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됐다. 대법원은 5년 후인 29일에서야 승소를 확정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경우 2012년 10월 소송을 제기해 2015년 6월 광주고법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는 데는 3년이 더 걸렸다.

“늦었지만 당연한 결과” 시민들, 배상 판결 환영

시민들은 판결을 환영하면서 “당연한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이국언 근로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문명국가의 상식으로서 당연한 결과”라며 “상식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또 “길게는 73년, 짧게는 25년 만에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인정됐다는 사실이 허탈하다”면서 “피해자들이 고령에 이르렀고, 대부분 병원 치료를 받아 김성주 할머니만이 재판에 참석했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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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10초 안팎의 판결 주문을 듣기 위해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면서 “재판이 길어진 데에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책임도 있지만, 우리 사법부의 재판거래 등 농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은 징용 피해자의 권리구제와 배상 문제를 수수방관해 온 우리 정부에 대한 질책”이라며 “힘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겪은 희생인만큼 애초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일본의 배상책임을 요구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제라도 정부는 도의적 책임을 갖고 소송 당사자가 아닌 정부가 직접 청구권을 확보하는데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일본은 외무상 불복 발언, 주일한국대사 초치 등에 나서며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은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던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 판결을 전향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정영일 광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역시 “늦었지만 당연한 일”이라며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에서 이제는 정부가 국민을 대신해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정신적·물적 보상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김 할머니 옆 사진은 고인이 된 강제동원 피해자 박창화 씨 사진. 뉴시스

황성효 광주진보연대 사무처장은 “피해자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판결”이라면서도 “피해자들과 우리 모두의 바람은 여전히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정확한 사죄를 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는 이번 판결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실질적인 배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후속 조치를 속도감 있게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류 중인 사건 향배는…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에 대해 배상판결을 내린 것은 현재 광주법원에 계류 중인 소송 2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29일 광주고등법원에 따르면 현재 광주와 전남 지역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미쓰비시 등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2건이 계류 중이다. 김재림(88)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 등 4명은 2014년 2월 광주지법에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미쓰비시 측은 “소장에 주소가 누락됐다”는 이유 등으로 재판을 연기했다.

이후 35개월 만인 지난해 1월 13일 첫 재판이 열렸고 같은 해 8월 11일 재판부는 원고들에게 각 1억원에서 1억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미쓰비시 측은 항소했고 지난달 31일 광주고법에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첫 재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다음 달 5일을 선고기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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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86) 할머니와 유족 등 2명도 2015년 5월 미쓰비시를 상대로 3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8월 8일 재판부는 “미쓰비시 측은 김 할머니에게 1억2000만원, 유족에게 325만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미쓰비스 측이 항소해 다음 달 15일 항소심 재판이 진행된다.

광주와 전남 지역에 신고된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유족 포함)는 2016년 기준 광주 16명·전남 29명 등 총 45명이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