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비정규직→정규직’ 보란 듯 무시한 ‘국립’ 서울대

입력 2018-11-27 13:04

서울대가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가이드라인 발표 이후 1년4개월여 동안 산하기관 수십 곳의 비정규직 전환 논의를 무시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가이드라인을 지킨 정규직전환심의위는 한 차례도 개최하지 않았고, 국회의 관련 자료 요구에는 현황 파악조차 하지 않은 채 허위내용을 보고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산하기관의 비정규직들은 정규직 전환 논의에서 방치된 채 재계약 기회마저 박탈당했다고 토로했다.

서울대는 최근 산하기관 111곳 중 46곳에 정규직 전환 대상 비정규직이 있다는 내용을 국회 교육위원회에 보고했다.

그러나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해당 기관들은 가이드라인에 따라 비정규직 일괄 전환을 위한 정규직전환심의위를 개최하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해 7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상시 업무를 ‘연중 9개월 이상 지속’하고 ‘향후 2년 이상 예상’되는 비정규직에 대해 정규직 전환 여부를 논의토록 했다. 하지만 산하기관들은 기존 기간제법대로 계약기간 2년 만료가 가까운 직원에 한해서만 일부 심의위를 연 게 전부다.

서울대는 정부 가이드라인 발표 당시 계획 시행 1단계 대상 기관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2월에는 교내 청소·경비·기계·전기 등 시설 용역·파견노동자 763명을 직접 고용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하고 이를 정규직 전환의 모범사례로 내세웠다. 하지만 ‘자체직원’으로 불리는 서울대 산하기관 비정규직 700여명은 여태 실질적인 가이드라인 적용을 받지 못했다.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상반기 전국 74곳 교육기관 중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보고되지 않은 곳은 서울대가 유일하다.

서울대는 계약기간 만료가 가까워진 자체직원에 한해 가이드라인에 따라 전환 여부를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조차 산하기관 모두에서 이뤄졌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가이드라인이 정규직 전환 심사기간 한시적으로 비정규직의 계약을 연장토록 하는 내용도 지켜지지 않았다.

일례로 실제 서울대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A기관에서는 지난해 정부 가이드라인 발표 뒤에도 비정규직들이 예외 없이 줄줄이 계약이 종료돼 일터를 떠났다. 계약종료 직전 다른 일자리를 구해 나간 이도 있지만 소수다. 빈자리에는 새 비정규직이 채용됐다.

거짓 자료 제출 의혹도 있다.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서울대는 교육위의 정규직 전환 관련 자료제출 요구에 A기관의 상시지속 업무 담당 직원이 전체 중 극히 일부인 3명이라고 답했다. 이 기관의 한 비정규직은 그러나 “상시로 지속되는 업무를 하는 게 최소 10명인데 전환 대상인 3명이 누구라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애초에 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거짓 자료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술 더 떠 A기관은 근로기준법까지 어겼다. 민주노총 노동법률지원센터가 이 기관의 비정규직 근로계약서를 검토한 결과 고정 연장근로수당을 약정해 현재 위법한 포괄임금제가 들어가 있었다. 계약서에 규정된 연장근로수당을 계산하면 학사 학력 직원의 경우 최저임금에도 미달했다. 서울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포함해 여태 산하기관 고용에 대해 책임을 방기해온 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또 다른 산하기관의 비정규직 B씨 사례는 더욱 심각하다. 서울대 산하기관을 전전하며 무려 29년째 계약직으로 일해 온 B씨는 현 기관에서 지난해 1월부터 고문서 등 문헌정보 열람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B씨는 26일 오전 이 기관으로부터 이메일로 30일자로 계약 종료된다고 통보받았다.

서울대 측은 B씨의 업무가 앞으로 상시 지속될 필요가 없어 가이드라인상 정규직 전환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해당 기관은 불과 2개월 전인 9월 “서고 관리 및 열람 업무 지원을 위한 인력 충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공문을 본부에 제출했다. 서울대 측의 현 입장과는 모순된다.

서울대는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관련 사실을 지적받고서야 실태 파악에 나섰다. 서울대 관계자는 “12월 중 문제가 된 기관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마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머지 기관 전수조사 일정은 확답하지 못했다. 이 기간 계약이 종료되는 기간제 직원들에 대해서도 대책을 내놓지 못한 상태다.

신경민 의원은 “서울대는 그간 기관에 책임을 전가하고 현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본부 차원에서 산하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의 이 같은 태도는 ‘국립법인대학’이라는 특수한 지위가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있다. 서울대는 법인화 이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적용이나 기재부 경영평가를 받지 않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서울대가 비정규직 전환 관련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가이드라인 대상인 다른 공공기관과 같은 방식으로 독려가 어렵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교수는 “최근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경제개혁 관련 정책이 과도하다는 식의 여론이 형성되다 보니 실무자들이 정부 지침을 어겨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비정규직 당사자에게는 삶의 질이 달린 문제인 만큼 원칙에 충실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