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씨에 삶이 멈췄다…KT 통신구 화재가 남긴 것

입력 2018-11-25 20:00
서울 서대문구 KT 아현지사 지하 통신구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변 일대 통신망이 마비된 지 이틀째인 25일 이화여대 인근 한 편의점 유리창에 카드 결제 등이 안 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윤성호 기자

24일 서울 KT 아현지사에서 발생한 통신구 화재로 수도 서울 한복판 일상이 마비됐다. 세계 최초 5세대(5G) 이동통신 상용화를 1주일 앞두고 벌어진 IT 강국의 ‘통신 재난’이다.

사고의 정확한 원인 파악에는 시일이 걸리겠지만 시작은 작은 불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하 통신구에 붙은 불로 광케이블이 타면서 수많은 시민이 피해를 보고 불편을 겪었다. 통신구는 케이블 부설을 위해 설치한 지하 공간이다. KT 아현지사 회선을 이용하는 서울 중구·용산구·서대문구·마포구 일대와 은평구, 경기도 고양시 일부까지 피해를 봤다. 불편은 사고 다음날인 25일에도 이어졌다.

재산이 물리적으로 손실된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 보이지 않는 손실이어서 정확한 피해 인원과 규모 파악은 불가능에 가깝다. 주로 권리와 편의가 침해를 당했다. 사람들은 통신망에 연결된 스마트폰에 삶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다. 전화와 문자메시지, 메신저 등 기본적인 연락 기능부터 결제, 길 찾기, 정보 검색까지 통신망이 작동하지 않으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극도로 제한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카드 결제 단말기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상점들은 영업에 차질을 빚었다. 정보통신기술(ICT)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현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통신 대란은 잊을 만하면 반복된다. 1994년 3월 10일 발생한 서울 종로 통신구 화재는 서울시내와 수도권 일대에 무더기 통신두절 사태를 몰고 왔다.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대구 지하 통신구에서 불이 나 대구시내 통신망이 마비됐고, 2000년 2월 18일에는 서울 여의도 전기·통신 공동구에서 불이 나 사흘간 통신 장애가 일어났다. 이어 2003년 1월 25일에는 서울 KT 혜화지사의 서버가 바이러스 공격을 받으면서 전국 통신망이 마비됐다.

다만 앞서 사고가 발생했던 시절에는 현재와 같이 시민들이 통신망에 일상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는 않았다. 때문에 피해를 체감하는 정도가 이번에 유독 컸다. 사실상 국가 기간시설이나 다름없는 통신망이 황당할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실태도 드러났다. 다음에 또 통신망이 마비되면 각종 중요 시설이 멈추며 국가적 재난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당장 다음 달 상용화될 5G의 안정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5G 시대에는 모든 것이 데이터로 연결된다. 스마트의료, 자율주행차 등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각종 산업들도 본격 추진된다. 하지만 통신망이 정작 물리적 재난에는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선 데이터 통신이라도 결국 광케이블을 거쳐야 하는 구조다. 단순하게 광케이블이 마비되면 차세대 통신 기술인 5G라고 해도 먹통이 되는 것이다. 통신망 마비는 사후 수습도 쉽지 않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고 발생 후 정보통신재난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에 따라 ‘주의’ 단계를 발령하고 대책회의를 열었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유성열 오주환 기자 nukuv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