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화의 인저리타임] 벤투 닮은 황인범의 등장

입력 2018-11-23 06:00 수정 2018-11-23 06:00
황인범. 뉴시스

이번 11월 A매치 평가전도 과연 ‘벤투’다웠다. 그간 기회를 받지 못했던 선수들의 활용과 함께 전술적인 면까지 충족하며 축구 팬들에게 아름다운 밤을 선사했다.

한국은 20일 우즈베키스탄과의 A매치 평가전에서 4대 0 대승을 거뒀다. 이날 경기 승리로 A매치 6경기 연속 무패(3승 3무) 기록을 이어가게 됐다. 이는 1997년 대표팀 전임 감독제 시행 이후 최다 연속 경기 무패 신기록이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선수들에게 주문했던 내용은 분명했다. 수비 상황에서도 최후방 수비진들이 끊임없이 짧은 패스를 통해 압박을 풀어가며 점유권을 가져왔다. 골키퍼들에게선 평소처럼 긴 패스를 통해 무작정 전방으로 공을 보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짧은 패스를 통해 상대 압박을 이겨내려 시도했다. 다만 전방에 공간이 날 때면 빠르게 볼을 보내 간결한 공격 전개를 펼쳤다. 한국은 공격 상황에서 4-2-3-1과 4-4-2 대형을 유기적으로 오갔다. 한국을 상대로 한 우즈벡의 점유율은 30%대에 불과했다.

벤투 감독은 선수단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축구를 하며 목표했던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손흥민, 기성용, 황희찬, 장현수, 정우영 등 주축 대부분이 각각의 사정으로 빠졌지만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벤투 감독이 호주 출국 전 공식 인터뷰를 통해 “팀적으로 성장할 좋은 기회”라며 “많은 선수를 기용해 경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었으면 한다. 원정 두 차례 평가전을 통해 새로운 선수뿐 아니라 그동안 기회를 얻지 못한 선수들도 우리 스타일에 맞출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던 것 그대로다.

성공적이었다. 그간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던 선수들의 재발견과 함께 플랜B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팀 적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도 됐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단연 황인범의 성장이다. 우즈벡전을 지배했던 가장 강력한 플레이 메이커였다.

벤투 감독은 11월 A매치 평가전에서 황인범에게 뜨거운 신뢰를 보냈다. “새로운 선수들을 시험해보겠다”는 예고대로 17일 있었던 호주전 선발명단과 비교했을 때 무려 5자리를 바꿨다. 하지만 정체성은 유지했다. 대형을 조직적으로 유지하며 4-2-3-1 포메이션을 그대로 가져갔다. 선수들의 포지션 적 변화 역시 없었다. 선수단의 변화에도 전술의 틀을 잡아주는데 황인범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기성용과 그와 함께 중원에서 호흡을 맞췄던 정우영의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황인범 덕택이었다. 두 차례 호주 원정 평가전을 통해 차세대 중원 사령관으로서의 자격을 입증했다. 호주전에선 볼 터치 73회와 패스 58회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팀의 엔진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축구에서 통계적인 수치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 면에서도 황인범은 찬사를 받기 충분했다.

황인범. 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기성용에 이어

계속해서 뛰었다. 중원에서 횡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며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역할을 다해냈다. 종종 측면으로 빠져 최전방에 자리한 황의조에게 전진 패스를 건네기도 했고, 상대 공격수들이 측면에서 볼을 잡을 때도 즉각 나서서 압박했다. 덕분에 공격은 더욱 역동성을 띨 수 있었다. 황인범의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한국은 허리 싸움에서 우즈벡에게 완승을 했다. 중앙에 맞불을 놓은 우즈벡의 미드필더들이 황인범을 잡아내지 못하고 밑으로 라인을 형성하자 중원 싸움에서 수적 우위를 가져가게 됐다.

우즈벡은 한국의 빌드업을 통제하기 위해 전방 압박을 시도했으나 타이밍을 놓쳤다. 오히려 압박을 위해 위로 올라올 때면 최전방에 자리한 황의조의 존재에 부담을 느껴야 했다. 황인범이 상대 미드필더 진에서 공간을 찾아내 배후공간을 틈틈이 노렸기 때문이다. 잇따라 허를 찔리자 기가 죽고 말았다. 우즈벡은 황인범을 필두로 미드필더라인에서부터 시작되는 강한 압박에 최후방 라인을 내려 지역 수비 체제로 변환해야 했고 이는 결국 골 폭풍을 얻어맞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

중앙 수비수들 간의 약속된 비대칭적 전진도 돋보였다. 김영권이 수비라인을 제어하며 공격 상황에서 앞으로 나가 역동성을 더했다면 정승현은 내려앉아 특유의 저돌적인 수비력을 펼쳤다. 후방 수비에서 안정감을 갖게 되자 1선에서의 공격적 전개 역시 빨라졌다. 전방에서 볼을 소유하지 못하며 우즈벡의 공격기회는 손에 꼽다시피 했다. 이날 선발로 나선 조현우 골키퍼의 최고 장점인 동물적인 반사신경은 여전히 빛났다. 약점으로 지적돼왔던 그의 발밑 기술 한계점이 얼마나 보완됐는지 확인해볼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파울루 벤투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출국 전 각오를 밝히고 있다. 뉴시스

황인범을 보면

황인범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선수 시절이 떠오를 법하다. 177cm의 신장도,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경기 스타일도 닮아있다. 왜소한 체격뿐 아니라 단점으로 지적되던 잦은 패스 미스도 그렇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황인범에게 더욱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벤투 감독과 황인범은 닮았다.

벤투 감독은 1988년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 벤피카에서 처음 프로 데뷔를 했다. 이후 자국 리그인 에스트렐라 아마도라와 비토리아를 거쳐 SL 벤피카를 오가며 포르투갈 FA컵 2회 우승을 경험했다. 2000년 스포르팅 CP에 입단해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리그와 FA컵, 슈퍼컵까지 리그의 모든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포르투갈 대표팀에 몸담으며 팀의 유로 2000 4강 진출을 이끄는 등 당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던 루이스 피구와 포르투갈 황금세대 일원으로 활약했다. 선수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경험이 조직적인 빌드업 축구를 강조하는 지금의 벤투 축구 철학의 토대가 됐다.

황인범의 성장은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위해 장기적인 세대교체를 해야 하는 벤투호에 천군만마와 같다. 아시안컵에서도 선수 구성에 따라 얼마든지 유용하게 그를 활용할 수 있다. 황인범은 호주 원정 평가전을 마친 뒤 현지 인터뷰에서 “친구나 가족들에게 농담처럼 인생의 운을 올해 다 쓴다고 말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운을 다 쓴 게 아니라는 걸 내년 그 이후에도 보여주고 싶다”고 다짐을 드러냈다.

이미 한 차례 은퇴 의사를 비쳤던 만큼 기성용의 태극마크 반납 시기는 아시안컵이 끝나는 때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기성용이 우즈벡전에서 황인범의 활약을 지켜봤다면 은퇴를 앞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을 것이다.

아시안컵에서 기성용과 정우영이 모두 복귀한다면 황인범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는 2선에서의 남태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는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벤투호를 상대하게 될 팀들은 이제 빌드업 과정이 1선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어떻게 효율적으로 중원에서 압박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 전광판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태화 기자가 함성소리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전하는 스포츠 연재입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