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국어 31번 문제(사진)를 풀어봤다. 학창시절부터 국어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1995년 겨울에 치른 수능에서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국어에서 발목을 잡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언론사 시험에 2년간 도전했고 회사에 들어온 뒤 12년 동안 글을 쓰며 먹고 살고 있다.
국어 31번은 맑은 정신으로 집중해 풀었지만 맞히지 못했다. 왜 틀렸는지 이해하는 과정까지 40분가량 머리를 싸맸다. 솔직히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완벽하게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다. 지면을 통해 고백할 용기는 어떤 고교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얻었다. 그가 정해진 시간 안에 정답을 골랐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유튜브에는 영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이 수능 영어에 경악하는 동영상이 돌아다닌다. 맛보기로 제시한 문제는 다섯명 중 네명이 틀렸다. 웃음기를 거두고 풀어보자 정답 비율은 조금 올랐다. 그래도 과반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니 나도 모르는 단어가 있네. 이거 어떻게 발음해?” “요즘 이런 단언 아무도 안 써”라며 어이없어 했다. 그들은 왜 한국 학생들이 이런 영어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문제당 1분 정도가 주어진다는 말에 “동시통역사 시험인가”라며 꼬집기도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영국인들과 영국 방송작가가 골탕 먹는 동영상도 쓴 웃음을 준다. 미간을 찌푸리고 풀어도 오답이 빈번하다. “뭘 물어보는지도 이해 안 된다” “1분? 나는 이거 한 문제에 한 시간 필요해”라며 웃거나 “이렇게 영어 배우면 안 된다”며 일갈하기도 한다.
수능 출제진에게 화살을 돌리는 일은 비겁하다. 쉬운 수능 탓에 변별력 대란이 벌어졌다며 야단쳤던 일이 불과 몇 년 전이다. 문재인정부가 수능 절대평가 공약을 접고 정시 확대로 돌아섰을 때 ‘불수능’은 예견된 일이었다. 모든 대학이 수능 성적으로 신입생의 30% 이상 뽑아야 하는 새 룰도 만들어진 터였다. 수시에서 소화하지 못하고 정시로 넘어오는 인원까지 합하면 내년 고교에 올라가는 학생부터 10명 중 4명 정도는 수능 성적으로 당락이 갈린다.
숙명여고 사태 등으로 학생부 위주 전형을 향한 비난이 거세기 때문에 수능 비중을 높이라는 압력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수능 출제진 입장에선 수험생이 불쌍하다거나, 고교 교실을 정상화한다거나, 입시 사교육을 줄이겠다거나 따위를 생각할 겨를은 없다. 사교육으로 고도로 훈련된 상위권 수험생들을 변별할 ‘킬러 문항’은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국어 31번은 21세기에 적합한 대입제도를 합의해내지 못한 교육 당국과 교육계가 공동으로 출제한 문제인 것이다.
수능 국어에선 한국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 사람이 풀지 못하는 문제가 나온다. 수능 영어는 영국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영국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시험이다. 수능날 아침, 출제진을 대표해 나온 점잖은 교수님은 전 국민에게 생방송으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댄다. 학교 공부에 충실했으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어떤 이는 정시 확대를 주장하다가도 국어 31번 같은 문제를 보면 비인간적이란다. 문제 풀어보라면 손사래 치고 도망갈 기자는 난이도를 논하며 매년 수험생들에게 주제넘은 ‘훈수질’을 한다. 이런 웃지 못할 코미디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걸까.
이도경 사회부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