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배우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배우 조덕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배우 반민정씨가 사건 당시의 상황을 폭로하며 그동안의 심경을 밝혔다. 영화계에 만연한 성폭력 ‘관행’을 뿌리 뽑아 달라는 호소와 함께 전반적인 인식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반씨는 ‘남배우 A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 JU동교동 바실리오홀에서 연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그는 “그동안 상대 배우의 ‘직접적인 성폭력’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느라 다른 언급은 가급적 피해 왔다”며 “(상대 배우가) 지인들까지 동원해 만든 ‘가짜뉴스’를 바로잡는 법적 싸움까지 하느라 만신창이가 됐다”고 호소했다. 이어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 자리에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영화계 일원으로 발언하려고 한다”며 입을 열었다.
반씨는 조씨의 성폭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2015년 4월 당시 촬영 현장을 회상했다. 그는 “현장에서 사건에 대한 처리가 제대로 됐다면 굳이 법적 대응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며 “감독과 소속사 대표, 영화 스태프들과 제작사 모두를 믿었으나 그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다”고 했다.
이어 “그들은 사실을 은폐하기 바빴고 피해자인 나를 압박했다”며 “그럼에도 주연이었기에 끝까지 촬영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해 강행했다”고 말했다. 반씨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영화 관계자들은 촬영 일정을 사전 공지 없이 바꾸거나, 바뀐 일정을 반씨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반씨는 “재판이 진행되면서도 내가 어떤 위험에 노출돼 있었는지 몰랐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항소심을 준비하면서 받게 된 자료를 보며 큰 충격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반씨는 “섭외 당시 소속사 대표와 총괄 PD로부터 노출이 없다는 확신을 받았고 그 상태로 계약을 했다”며 “그런데 법정에 제출된 영화 제작사 대표의 녹취록에는 ‘현장에서 벗기면 된다’라는 식의 대화가 오갔고, 그 자리에는 소속사 대표도 있었다”고 말했다.
반씨는 이날 조씨의 유죄가 확인됐음에도 영화계 안에서 여전히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는 “(상대 배우는)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피해자인 저와 영화계 자체를 비난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제지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은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영화계가 나서서 변하고 싸워야 한다”며 “상당수 피해자는 나처럼 말하는 피해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는 이유로 캐스팅에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반씨는 “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현대사회 구성원이다. 피해를 입었을 때 사법 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결과를 이끌어냈다”면서 “그런데도 난 내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씨는 마지막까지 영화계에 심어진 뿌리 깊은 관행을 비판하며 “신체 노출, 폭력 등 민감한 장면이 들어가는 영화의 경우 배우에게 사전 설명을 한 후 계약서에 반영해야 한다”면서 “현장을 핑계로 자행되던 인권침해 및 성폭력에 대해 영화계 내부에서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연기자들 역시 상대 배우와 연기에 대해 사전합의를 해야 하며 ‘연기·애드립’을 핑계로 상대 배우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배우 조덕제 성폭력 사건’은 조씨가 영화 촬영 도중 상대 배우였던 반씨의 속옷을 찢고 바지 안에 손을 넣어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등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이다.
1심 재판부는 “위법성이 없다”며 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가 “피해자와 사전 합의가 없었다” 등의 이유로 유죄 선고했다. 대법원도 지난 9월 13일 조씨의 혐의를 인정하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