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이 본문을 노동신학으로 해석한다면, 노동의 굴레와 착취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참된 자유와 인식을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도 일하는 노동자였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했으며,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불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들의 쉼을 보장하는 예수님이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동춘 연구위원은 지난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100주년사회봉사관 예배실에서 ‘노동의 신학과 노동윤리-일에 대한 신학적 관점’이란 주제로 발제를 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청년운동본부가 마련한 슬기로운 청년생활 이슈포럼 ‘우리가 꿈꾸는 노동’의 일환이었다.
기윤실 청년운동본부는 지난 5월 첫 번째 청년포럼으로 한반도 평화 문제를 다뤘고 지난 7월에는 결혼과 비혼 문제를 탐구했다. 이번엔 세 번째 시간으로 청년의 실업과 취업, 좋은 일자리와 적정 임금, 노동과 직업을 바라보는 신학적 관점 등에 대해 살피고 대화했다.
김 연구위원은 성경 속 노동이 에덴 산 추방에 따른 형벌이 아님을 강조했다.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노동자 예수, 노동에 온 힘을 다하라고 주문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장막을 만드는 노동으로 수입을 벌어들여 이를 불꽃같은 선교활동에 투입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까지 풀어냈다. 다음은 김 연구위원의 발제문 가운데 노동의 신학적 의미를 분석한 부분.
노동의 신학과 노동윤리- 일에 대한 신학적 관점
김동춘 교수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II. 노동의 신학적 의미
1. 노동은 인간에게 부여된 위임(commission) 혹은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다.
1). 창조주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주님의 창조세계를 경작하고(cultivate), 돌보고(care), 관리하고, 경영하도록(management) 위임하셨다(창2:5-8, 15).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임하신 것은 가정(familia생육과 번성), 국가(politica지배 와 다스림), 경제(economica노동과 경영)다.
3). 창1:28의 ‘땅의 지배’(dominium terrae)는 다른 피조물을 폭군처럼 지배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임금이 백성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 이 땅의 재화(財貨)를 일구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땅의 지배(경작, 개발, 창조행위)를 통해 문화적 행위에 참여하며, 자연물을 관리, 경영하는 주체가 된다. 동시에 인간은 그들을 ‘동료 피조물’로 대해야 한다.
4). 노동은 인간이 자연을 경작하고 다스림을 통해 역사와 사회, 즉 문화를 이루어나 가는 총체적인 활동이다. 노동의 위임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에 개입하라는 요구이다.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을 책임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행위이다.
5).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반은총에 따라 자연(nature)과 역사(history)안 에서 다양한 노동행위(경작, 개발, 변화, 보존)를 통해 하나님의 위임명령을 수행 한다-그러나 문화명령안에 담긴 근대의 주체 중심적 사고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6). 일(노동)은 하나님의 창조계획의 일부이며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다. 일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인간은 일을 통하여, 일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2. 노동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다.
1).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하 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대리자로 그 직무를 수행한다.
2).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그들을 돌보시고, 보존하고 축복하신 것처럼, 인간의 삶과 활동 속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그의 직무를 (대표적, 대행적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수행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3). 인간의 노동은 동료 피조물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죽임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획과 구상, 의도, 실행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대리하여 정의롭게 반영되어야 한다.
3. 교정되어야 할 노동에 대한 신학적 오해
1). 노동은 타락으로 인해 발생된 형벌과 저주가 아니다. a). 창1:28에서 바라본 노동은 창조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위임된 것이다. 노동은 처음부터 인간의 본래 상태에 속하는 요소이므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b). 창3장에서 바라보는 노동은 타락으로 인한 형벌과 저주라는 소극적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해석하면 일이 축복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타락으로 노동은 생존을 위한 고역이 되고, 비인간적 경쟁과 착취의 결과물이 되고 만다. 이제 노동은 기쁨과 감사의 통로가 아니라 생계와 보수(報酬)를 위해 일해야 하는 억지스런 의무로만 남게 된다 : 출산, 육아. 천국은 이런 형벌적 노동으로부터의 쉼을 주는 자유와 해방을 선물한다. c). 노동은 죄의 저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은총아래 있어 죄의 억제 와 잠재력의 발현(창조적 노동)을 통해 신적 은혜의 영역 안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 고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 로다”(전5:18).
2). 하나님은 영원 속에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일하시는 하나님(working God)이다.
• 노동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일부이다. 6일간의 창조사역은 ‘수고로운 노동’이며, ‘노동적 활동’이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노동없이 이루어진 비활동적 창조로 간주하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의 신 개념이다. 무(無)운동적, 비(非)활동적 신관은 성 경적 하나님 개념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적이며,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에 근거한 존재론적 신관이다. 만일 기독교가 말하는 신적 본질에서 활동성과 운동성을 제거하고 관조(觀照)와 무감정(無感情apatheia)의 신 개념이 강조된다면, 이는 성경에 서 계시되는 바, 인간의 역사와 현실 속에 참여하고, 개입하시며, 활동하시며 변화를 이끌어 가시는 활동하시는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님개념이 배제될 것이다.
• 영원 안에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속에 들어오셔서 행하신 최초의 모습은 '창조적 일'(creational work)이다. 하나님의 최초의 자기계시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 ‘보시기에 좋았더라’: 매일 일을 마치신 하나님은 자신의 일의 결과에 대해 만족 하며 기뻐한다.
• 6일간의 창조활동 후 쉼을 가지셨다는 것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반증한다(창 2:2-3).
3). 예수 그리스도와 노동 :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현설적(docetic) 주님이 아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인성을 입으실 뿐 아니라 인간적 조건을 취하시고, 노동하는 인간으로 사셨다.
(1). 일하시는 예수님 :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노동자 예수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막6:3).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이 없이 일하셨다. 그리고 낮에는 일하시고 밤에 쉬셨다.
(2). 일하는 자들의 쉼을 보장하시는 예수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겨를도 없음이라”(막6:7-13, 막6:30-31). 예수님은 노동 착취자가 아니라 일하는 자의 쉼을 보장하신다.
4). 영육/성속 이원론은 노동 혐오적 신앙인을 조장한다. a) 안식일과 노동: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 유대교 종교권력자들은 안식일의 형식적 준수에 초점을 맞춰 안식일의 본래 취지인 노동하는 인간의 인권과 사회보장법적 본질을 곡해하여 노동금지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 준수보다 인간보호가 먼저라는 혁명적 발상을 제시 하여 안식일 노동을 통해 이웃에게 선을 발휘하셨다. 노동없는 안식일이 인간을 더욱 비인간화한다면 잘못이다. 노동이란 그 행위를 통해 이웃에게 선을 제공하는 행위라야 한다. b). 묵상, 예배, 금욕을 강조하고, 일을 멀리하려는 종교인들: 거룩한 예배자들은 거룩한 게으른 자들이 아니다.
• 말씀 듣는 마리아는 관상하는 삶(vita contemplativa, 기도, 묵상, 예배)의 그리스도인으로 우대받고, 부엌에서 음식준비와 설거지하며 대접하는 일로 분주했던 마르다는 활동하는 삶(vita activa, 노동, 일, 행위)을 대표하는 열등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 전통에서 인식되었다.
• 피로사회는 근대적 개발과 성장이데올로기, 직선적 시간관으로부터 휴식과 멈춤, 명상적 삶을 말하려는 것.
• 예배에 목숨 걸지 말고 노동하는 일상에 최선을 다하라.
• 목회자, 신부, 수도원의 생활리듬과 매일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직업인의 삶은 다르다!
• 선교사 바울의 노동원칙: 노동하여 벌어들인 수입으로 복음전파에 힘씀(행18:23)4).
• 성경인물들은 대부분 종교적 관상가(觀想家)들이 아니라 당대의 도시와 문화의 중심지, 국가의 정치무대에서 일하는 직업인들이었다.
•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 명상과 노동의 베네딕트회(Benedictine Order) 의 규칙.
4. 노동과 소명: 직업의 도구로서 노동
1). 루터의 직업윤리 (1). 소명: 부르심의 이층구조를 철폐하고, 모든 부르심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직업 소명설 “당신의 집에서 하고 있는 일은 당신이 마치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일치하는 이곳 땅위에서의 소명이라 여기며 행하는 것들을 마치 우리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처럼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위와 일을 거룩한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위와 일에 대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복종심과 일의 원천이라 할 말씀과 신앙에 따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의 지위와 삶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수도자가 수도원에 들어가 금욕생활을 하며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은 위대한 일로 보이는 것 같고...반면에 아녀자가 요리를 하고 집안을 청소하는 등의 가사 노동은 하찮은 일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바로 거기에 있다. 비록 하찮은 일이라 해도 그 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 일은 수도자들이 금욕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보다도 탁월한 것이다, 수도자들의 (자기 공로적인)행위에는 하나님의 뜻이 머물러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가사 노동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 되기 때문 이 다”(루터 선집. V. 102)
(2). 성직에로의 부르심을 직업소명으로 전환함.
• 종교영역에 제한된 소명을 세속 직업의 영역으로 확장함으로써 부르심의 성스러 움의 의미를 세속화시켰을 뿐 아니라 세속 직업으로의 활동을 신적 부르심으로 간주함으로써 직업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덧입혔다. 이것이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liness)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도록 불러내심을 받았 으며, 동시에 세상속으로 말과 행위를 통한 증언의 삶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 루터의 한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전7:20). 현재의 직업에만 소명으로 제한할 위험이 있거나 현존하는 사회적 신분과 직업을 영구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오해할 수 있었다. 개개인이 마치 어떤 특정 직업인으로 부르셨다는 오해를 제공한다. 특정 직업에만 하나님의 소명이 있지 않고, 주님은 모든 직업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다.
• 직업의 교체: 요셉의 직업 변천: 목동-노예-가정 노예-가정 청지기-모범죄수-현명한 해몽가-지략이 뛰어난 경영자, 곡물중개인(무역업자)-입국관리인-위기상황 지략가-토지 매매 중개인.
2). 칼빈의 직업윤리
•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soli Deo gloria).
• 세계내적 금욕과 직업윤리: 직업은 영혼의 수련도장이고 종말론적 결산의 태도로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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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