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의 전국적 전파에는 각 지역 기독교 ‘미션 스테이션’이 거점 역할을 했다.” 내년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3일 서울 종로구 서울YMCA 건물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 심포지엄에서 나온 얘기다. 그간 기독교인들이 1919년 3·1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졌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민중화단계에서의 기독교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가려진 편이었다. 주최 측이 ‘3·1독립운동의 지역적 전개와 기독교’를 이번 심포지엄 주제로 정한 이유기도 하다.
“기독교는 3·1운동 확산의 통로”
이날 ‘서울·경기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란 주제로 발표한 송현강 한남대 교수는 독립선언식과 관련된 기독교계 인사들의 참여 과정 역시 한국교회 조직이 활용됐다고 했다. 교파별, 단체별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3·1운동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여기엔 선교사와 교회가 세워 운영했던 기독교학교와 병원들도 포함됐다.
그는 “평안도 지역과 서울 지역의 경우 당시 북장로교 선교부 담당으로 총회 활동이나 사업을 통해 목사나 장로들이 자주 만날 수 있었다”며 “남강 이승훈 선생은 이러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3·1운동 코디네이터로 활약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교회 및 기독교학교를 중심으로 한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역시 (3·1운동 태동의) 한 축이었다”고 덧붙였다.
‘충청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 주제를 맡은 황미숙 목원대 교수 역시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전시기부터 세워진 교회·학교의 조직망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지역은 대체적으로 조선시기부터 존재해왔던 장터에 세워진 교회와 기독교 학교가 있던 지역”이라며 “충청지역은 중앙 주도 세력과 연계되지도, 독립선언서가 직접 전달되지도 않았지만 이미 민족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교인과 주민들을 규합할 수 있는 조직망이 갖춰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호남지역 기독교계 3·1운동도 미션스테이션이 있는 지역에서 활발히 일어났다. 기독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선 교회 직분자들과 교인들, 전도부인들, 병원 사무원들이 활발한 참여를 보였다고 한다. 영남도 마찬가지였다. 선교사들에 의한 교육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됐었던 터라 학교를 통한 3·1운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이용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총무이사는 “대구·경북지역은 미국북장로회가, 부산·울산·경남지역은 호주장로회가 관할하는 선교구역으로 7곳에 스테이션이 있었다”고 말했다.
“기독교는 연합의 통로”
이날 ‘호남·제주 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를 발표한 송정연 연세대 박사는 “민중화단계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살펴보면 교회나 기독교학교가 있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동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며 “그러나 그곳에 천도교회가 있으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제휴했고, 교회나 기독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 혹은 유생·농민 등이 중심이 되고 돕는 식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3·1운동에 있어서 지역으로 내려갈수록 더 다양한 역할로의 기독교인 참여가 눈에 띈다”며 “그 규모와 강도도 중앙에 비해 감소한다”고 말했다. 교회와 교인이 3·1운동을 강하게 주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보다는 지역교회가 다른 세력과 연합하는 사례가 더 많이 관찰된다고 했다.
김 소장은 이를 두고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 참여했던 건 자신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하게 해방·독립을 바랐던 것”이라며 “우리 민족 공공의 선을 위해서는 타 교파는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믿음의 선배들은) 복음과 정의를 위한 고난과 거기에 동참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며 “이들이 가졌던 3·1정신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민족사적 과제인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절실히 요구되는 정신이다”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현재 북한, 해외 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에 대해서도 연구 중이다. 총 11명(이날 발표한 4명 포함)이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결과물이 나오는 대로 단행본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글 사진=황인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