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부장판사가 ‘사법농단 의혹’ 수사 중인 검찰의 압수수색이 위법했다고 주장한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상대로 31일 명확한 사실관계 확인을 공개 요구했다. 사실관계 확인에 따라 위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취지다. 이 현직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 법원행정처의 ‘사찰’을 당했던 인사다. 일부 판사들이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구속 이후 공개적으로 검찰 수사 ‘흠집내기’에 나서자 이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인다.
박노수 전주지법 남원지원장은 지난 30일과 31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이 위법하게 집행됐다는 김 부장판사에게 “압수수색영장에 기재된 ‘수색의 대상 내지 범위’가 대법원 전체 이메일 백업 데이터였느냐”면서 “만약 전체 백업 데이터였을 경우 유효한 영장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를 없애고 법원 가족들의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공유하기 위해 빠른 설명을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박 부장판사는 “답변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 취지와 이유라도 밝혀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검찰 수사의 위법 여부를 가리기 위해 사실 관계를 명확히 밝히라는 얘기다.
앞서 김 부장판사는 30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검찰이 피의 사실과 무관한 이메일까지 별건 압수했다”고 비판했다. 김 부장판사는 2015년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댓글조작’ 사건의 파기환송심을 맡았다. 검찰은 당시 행정처의 재판 개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김 부장판사 이메일을 압수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절차상 위법 행위가 있었다는 게 김 부장판사의 주장이다. 검찰은 “적법 절차에 따른 것”이라고 맞섰다.
박 부장판사가 김 부장판사를 상대로 공개 확인을 요구한 것은 일부 판사들을 중심으로 검찰 수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현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특히 임 전 차장이 검찰에 구속된 뒤 비판 경향은 더 심해졌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다. 최인석 울산지법원장은 임 전 차장 구속 이틀 뒤인 지난 29일 내부통신망에 “검찰의 압수수색영장 청구는 홍수를 이루고 있다”며 “법원은 검사에게 영장을 발부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최근 사법농단 의혹 수사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양승태 대법원’ 산하 행정처의 사찰 피해자였던 박 부장판사가 검찰 수사에 반발하는 내부 분위기에 제동을 걸기 위해 내부망에 글을 올린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박 부장판사를 시작으로 검찰 수사에 대한 법원 내부 갈등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행정처는 2016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한 박 부장판사를 떨어트리기 위해 다른 판사를 지원하려는 계획이 담긴 문건을 작성한 적이 있다. 임 전 차장의 지시로 작성된 이 문건에는 “(박 부장판사가 당선될 경우) ‘판사회의 중심의 수평적 사법행정 구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적시돼있다.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