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일제 전범기업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 기업에 대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다. 이 청구권이 1965년 박정희정부에서 이뤄진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쟁점 사안을 4개로 분류해 논의한 결과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이춘식씨 등 피해자 4명이 일본 제철기업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이씨 등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고 1인당 1억원의 위자료 및 지연손해금을 신일철주금에서 지급하도록 판결한 원심을 유지했다.
신일철주금은 2012년 신일본제철과 스미토모금속의 합병으로 출범한 제철기업. 신일본제철은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전범기업인 일본제철의 후신이다. 이씨 등은 1941~1943년 일본제철에서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지만, 임금을 받지 못했다. 공장은 소련군 공습으로 파괴됐고, 이씨 등은 1945년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이씨 등은 2005년 2월 처음으로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8개월, 2013년 8월 대법원에 사건을 다시 접수한 지 5년2개월 만에 소송을 매듭지었다. 그 사이 4명 중 3명은 세상을 떠났다. 이씨만 유일하게 생존했다. 이 사건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직 시절 사법부에서 청와대의 요구를 받고 선고를 의도적으로 지연한,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에 휩싸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법원은 사건의 쟁점을 4개로 분류했다. ①원고에 대한 일본 법원 판결의 효력과 기판력(일본 법원에서 확정된 피해자 패소의 국내 효력 여부) ②피고의 구일본제철 채무 부담 여부(신일철주금의 일본제철 채무 승계 여부) ③청구권협정에 따른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 여부(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피해자들의 권리 소멸 여부) ④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항변 여부(신일철주금에서 주장하는 피해자 권리 소멸시효의 타당성)가 그것이다.
③번 쟁점은 대법관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 핵심 사안이었다. 한·일 청구권협정 전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이 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는지 △포함된다면 어떤 효력이 발생하는지 △그 효력에서 피해자 개인의 권리가 소멸되는지, 외교적 보호권만 소멸되는지 △법적으로 소멸되지 않아도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이 제한되는지가 논의됐다.
대법원은 이 쟁점과 관련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냈다. 전원합의체에 참여한 대법관 13인 중 7인의 다수의견이다.
대법원은 그 근거로 △한·일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 목적이 아닌 샌프란시스코 조약(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이 일본의 주권 회복을 인정한 조약)에 근거해 한·일 간 재정·민사적 채권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목적으로 이뤄진 점 △일본에서 한국으로 지급된 경제협력자금(무상 3억 달러·유상 2억 달러)과 피해자 개인의 권리문제 해결 사이에서 대가 관계가 모호한 점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아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됐다고 볼 수 없는 점을 들었다.
재판부는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에 비춰 일본 법원 판결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 관련법에 비춰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 행사를 인정한 원심은 타당하다”며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 불법 식민지배 및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청구권이다.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