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전범기업 강제동원 피해자 恨 풀었다… 대법원 쟁점사안 4가지

입력 2018-10-30 17:15 수정 2018-10-30 17:34
일제 전범기업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오른쪽)와 다른 피해자 고 김규수씨의 부인 최정호씨가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재판을 마치고 나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씨는 소송을 낸 피해자 4명 중 유일한 생존자다. 최현규 기자

대법원이 일제 전범기업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 기업에 대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다. 이 청구권이 1965년 박정희정부에서 이뤄진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쟁점 사안을 4개로 분류해 논의한 결과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이춘식씨 등 피해자 4명이 일본 제철기업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이씨 등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고 1인당 1억원의 위자료 및 지연손해금을 신일철주금에서 지급하도록 판결한 원심을 유지했다.

신일철주금은 2012년 신일본제철과 스미토모금속의 합병으로 출범한 제철기업. 신일본제철은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전범기업인 일본제철의 후신이다. 이씨 등은 1941~1943년 일본제철에서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지만, 임금을 받지 못했다. 공장은 소련군 공습으로 파괴됐고, 이씨 등은 1945년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이씨 등은 2005년 2월 처음으로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8개월, 2013년 8월 대법원에 사건을 다시 접수한 지 5년2개월 만에 소송을 매듭지었다. 그 사이 4명 중 3명은 세상을 떠났다. 이씨만 유일하게 생존했다. 이 사건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직 시절 사법부에서 청와대의 요구를 받고 선고를 의도적으로 지연한,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에 휩싸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 전범기업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 착석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대법원은 사건의 쟁점을 4개로 분류했다. ①원고에 대한 일본 법원 판결의 효력과 기판력(일본 법원에서 확정된 피해자 패소의 국내 효력 여부) ②피고의 구일본제철 채무 부담 여부(신일철주금의 일본제철 채무 승계 여부) ③청구권협정에 따른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 여부(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피해자들의 권리 소멸 여부) ④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항변 여부(신일철주금에서 주장하는 피해자 권리 소멸시효의 타당성)가 그것이다.

③번 쟁점은 대법관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 핵심 사안이었다. 한·일 청구권협정 전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이 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는지 △포함된다면 어떤 효력이 발생하는지 △그 효력에서 피해자 개인의 권리가 소멸되는지, 외교적 보호권만 소멸되는지 △법적으로 소멸되지 않아도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이 제한되는지가 논의됐다.

대법원은 이 쟁점과 관련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냈다. 전원합의체에 참여한 대법관 13인 중 7인의 다수의견이다.

대법원은 그 근거로 △한·일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 목적이 아닌 샌프란시스코 조약(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이 일본의 주권 회복을 인정한 조약)에 근거해 한·일 간 재정·민사적 채권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목적으로 이뤄진 점 △일본에서 한국으로 지급된 경제협력자금(무상 3억 달러·유상 2억 달러)과 피해자 개인의 권리문제 해결 사이에서 대가 관계가 모호한 점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아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됐다고 볼 수 없는 점을 들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오른쪽)와 다른 피해자 고 김규수씨의 부인 최정호씨가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재판을 마치고 나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재판부는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에 비춰 일본 법원 판결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 관련법에 비춰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 행사를 인정한 원심은 타당하다”며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 불법 식민지배 및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청구권이다.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