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주지훈(36)의 2018년은 그야말로 찬란하게 빛났다. 올해를 ‘주지훈의 해’라 칭함에 있어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압도적인 작품 수를 차치하고라도, 흥행은 물론 대중적 인기와 평단의 호평까지 두루 거머쥐었다.
지난해 말 선보인 ‘신과함께-죄와 벌’의 1000만 흥행부터 조짐은 심상찮았다. 올해 개봉한 세 편의 영화 ‘신과함께-인과 연’ ‘공작’ ‘암수살인’이 연달아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뿐인가. 생애 처음 칸영화제에 초청받았고, 각종 시상식 트로피들을 하나둘 수집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지훈은 들뜨는 법이 없다. ‘암수살인’ 개봉 즈음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언제나처럼 무던하고 여유 넘쳤다. “너무 감사하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축복받은 한 해인 것 같아요. 작품이 몰리긴 했지만 각기 다른 장르와 캐릭터로 만나 뵐 수 있었다는 게 다행스러워요.”
실화 바탕의 영화 ‘암수살인’(감독 김태균)에서 주지훈은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비뚤어진 삶을 살아가는 살인범 강태오를 연기했다. 사람을 죽여 경찰에 잡혀 들어간 그가 “내가 죽인 사람은 총 7명”이라는 추가 자백을 하면서 집념어린 형사 김형민(김윤석)이 사건에 뛰어들어 퍼즐을 맞춰나간다.
모든 작품에 최선을 다하지만 ‘암수살인’은 특히 물리적인 시간을 많이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다는 게 주지훈의 말이다. 그는 “촬영 전 매일 감독님을 찾아가서 사투리를 익혔다”며 “제작을 맡은 곽경택 감독님이 사투리 지도를 해주셨는데, 김태균 감독님과 의견이 같아 디렉션을 믿고 따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사이코패스를 연기하면서 인물의 당위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심플하게 생각했어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하는 악인이라면 레퍼런스를 찾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강태오는 아니잖아요. 그냥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죠. 실제로도 이런 사람이 널려있다는 게 참 무서운 일인 것 같아요.”
상대역 김윤석과의 치밀한 심리전이 극을 지탱한다. 액션신 하나 없이도 두 배우의 호흡만으로 묵직한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주지훈은 “디테일하게 손발을 맞춰 마치 톱니바퀴처럼 돌아간 작업이다. 속임수를 쓸 수가 없었다. 사전에 모든 동작들을 약속해놓고 연극하듯이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라이브한 톤 앤 매너잖아요. 동작도 많고 울퉁불퉁하죠.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디테일들을 통째로 잡아 촬영에 들어갔어요. 다 같이 모여서 만들어가는 작업이 새롭더라고요. 오랜만에 무대 공연을 준비하는 것 같은 치열함을 느꼈죠. 그런 치열함이 고통스러우면서도 재미있었어요.”
김윤석과 리액션을 주고받는 과정에선 마치 탁구 랠리를 이어가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호흡이 되게 좋았어요. 굉장히 기분 좋았던 순간이 있는데, 초반에 제가 뿜어내는 신이 있었거든요. 윤석이 형이 ‘오, 이 새끼 봐라. 올라온다 올라온다’ 칭찬을 해주셨는데, 그때 자신감이 확 생겼죠.”
‘아수라’(2016)를 기점으로 정우성 하정우 황정민 이성민 등 걸출한 선배들과의 작업 기회가 잦았다. 주지훈은 “때로 연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데, 베테랑들과 작업하면 그럴 위험이 없다. 상대의 호흡과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그것에 반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이드라인이 잡힌다”고 했다.
“연기 장인들이잖아요. 한국영화계를 떠받들고 있는 사람들이죠. 선배들을 보면 정말 멋있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선배들 덕에 안정감을 갖고 연기했듯 언젠가는 나도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가 돼야 할 텐데….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굉장히 파이팅이 되고 있어요.”
그는 “지난 몇 년간 좋은 선배들을 만나면서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한 사람으로서 제 삶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다”면서 “굉장히 멋진 일이지 않나. 변화의 정도가 크든 작든 누군가의 인생의 방향을 틀어줬다는 게. 나에게도 그런 좋은 영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모든 면에서 편해졌어요. 예전에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지’ 이해하게 됐죠. 불만이 있을 때도 좋게 얘기하면 더 쉽게 메시지가 전달되더라고요. 그러면 릴렉스해져요. 미움의 강도는 약해지고 예민함도 누그러지고…. 제 삶이 점점 편안한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모델에서 연기자로 전향한지 어느덧 12년을 훌쩍 넘었다. 데뷔작 ‘궁’(MBC·2006) 때와 비교하면 유명세를 대하는 태도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주지훈은 “데뷔 초기에는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컸다. 나도 그들을 좋아하지만 표현을 못했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던 거다. 대처법을 몰랐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졌다. 더 능숙해졌고, 너스레도 늘었다. “무대인사 하고 나갈 때마다 ‘미안해’라고 외쳐요. 모두에게 똑같이 못 해드리니 죄송해서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거죠. 수용 가능한 용량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엔 512바이트 정도였다면 지금은 1테라쯤 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