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시장 큰 손’ 사우디, 언론인 살해 민낯…무기 판 서구도 전전긍긍

입력 2018-10-26 17:47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가면을 쓴 시민이 25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 앞에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규탄하며 시위하고 있다. AP뉴시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사전 계획한 것이 확실시되면서 대(對) 사우디 무기 판매를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다. 사우디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비인도적인 전쟁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대한 양의 무기를 판매했던 서방국가들은 일제히 긴장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25일(현지시간) 카슈끄지 살해사건과 유럽연합(EU) 회원국의 사우디 무기 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결의안에 강제성이 없어서 실제로 무기 수출이 중단될지는 미지수다.

EU는 이미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2016년 2월에도 통과시켰다. 사우디가 아라비아 반도 남단에 있는 나라 예멘 내전에 개입해 난민을 대량 유발하는 등 인도주의적 사태를 일으킨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결의안도 강제력은 없었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 영국은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우디에 막대한 무기를 팔아치웠다.

이 때문에 사우디 정부가 예멘에서 비인도적인 사태를 일으킬 때마다 무기를 판매한 국가들도 함께 비난받았다. 지난 8월에는 사우디 주도 국제동맹군이 예멘 수도 사나에서 통학버스를 폭격했다. 이 사고로 버스에 타고 있던 어린이 40여명이 사망했다. 당장 무기를 판매한 나라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빌 반 에스벨드 휴먼라이츠워치 아동 인권 연구원은 서구 국가에 “분쟁지역에서 사용될 수 있는 무기를 공급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유럽의회 의원들이 25일(현지시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유럽의회에서 사우디 정부에 무기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는 결의안에 투표하고 있다. AP뉴시스


두 번의 결의안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對) 사우디 무기 수출을 중단한 것은 독일뿐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21일 사우디와 맺은 4억1600만 유로(약 5400억원)규모의 무기판매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0년간 사우디에 11억 유로(14조 3000억원) 어치의 무기를 팔아치운 프랑스는 진상이 확실히 규명될 때까지 결정을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연일 사우디 규탄 성명을 내놓는 영국도 무기수출 중단은 언급하지 않았다.

카슈끄지가 망명지로 택했던 미국조차 무기수출 중단을 망설이고 있다. 미 의회에서는 사우디에 무기 판매를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온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사우디에 1100억 달러(약 125조원)어치의 무기를 판매하고 있으며 여기에 수십만개의 일자리가 걸렸다”며 반대했다.


서구 국가들이 무기수출 중단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천문학적인 규모의 위약금 때문이다. 캐나다는 사우디 정부와 150억 캐나다달러(약 13조원) 규모의 경장갑차 판매 계약을 맺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이미 지난 18일 카슈끄지 사건에 대한 사우디의 해명에 따라 이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우디 정부가 카슈끄지 살해를 사전에 계획했다는 의혹이 짙어진25일기자회견에서도 여전히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이 계약을 깰 경우 사우디에 물어줘야 할 위약금 규모가 수십억 달러에 이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무기 거래를 하기로 한 것이 문제라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다. 캐나다 일간 글로브앤메일은 “카슈끄지 사건은 캐나다가 사우디에 무기를 판매한 것을 비난해 온 사람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내게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무기거래 계약을 맺은 스티븐 하퍼 총리는 물론 이를 그대로 승인한 트뤼도 총리 모두 책임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