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완 교수의 좌충우돌 아랍이야기⑳ 사우디아라비아Ⅱ

입력 2018-10-20 09:17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중동의 수니파 맹주를 자처하는 국가이다.

성지 메카를 접수하고 아라비아 반도의 중앙 전역을 통일한 국부 압둘아지즈이븐 사우드국왕이 계율이 엄격한 보수적인 수니파 와하비즘을 이슬람 통치 이념으로 삼아 1932년에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였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권력 승계로 인한 혼란을 우려하여 자신의 자식들의“형제 간 승계 원칙”을 유언으로 남겼다.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사우디에서 초대 국왕은 22명의 부인과 45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는 특히 10번째 부인을 총애하였는데, 그녀는 13세에 이븐 사우드 국왕의 8번째 왕비로 들어 왔다가 이혼 당하고 다시 10번째 왕비로 들어온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사우디 토호 가문 출신의 총명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초대 국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아들을 7명 낳았는데 그녀의 아들들이“수다이리 세븐”이라 불리며 사우디 왕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수다이리 왕비의 아들들은 4대 칼리드 국왕의 집권을 도우면서 권력과 가까워졌다. 즉위 6년 만에 칼리드 국왕이 사망하고 수다이리 7형제 중의 맏형인 5대 파드 국왕이 즉위하였으며 이후 23년 간이나 사우디를 통치하면서 수다이리 형제들의 집권 기반을 다졌다.

뒤이어 6대 국왕은 수다이리 세븐에 속하지 않는 그들의 이복형제인 압둘라 국왕이 즉위하였다. 압둘라 국왕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0년 간 사우디를 통치하고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수다이리 세븐의 두 명의 왕자들이 왕세제로 책봉되었으나 국왕이 되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등졌다.

압둘라 국왕의 사망 이후 역시 수다이리 세븐으로왕세제였던 살만이 신속하게 즉위하였으니 그가 곧 사우디의 현 국왕이다.

살만 국왕은 즉위한 이후 자신의 막내 동생과 조카를 연이어 일순위 왕위계승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2017년 6월에 30대 초반의 자신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33세)을 왕세자로 임명했다.

초대 국왕의 아들들이 많고 형제 간에 왕위가 승계되다 보니 즉위 당시 국왕이 이미 고령이 될 수 밖에 없고 왕실이 노쇠하여 진 것은 문제였으나,이는 국부의 유언을 저버린 처사여서 살만 국왕에서 왕세자로 권력 승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살만 국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자 파격적인 개혁 정책들을 쏟아냈다. 사우디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35세 이하 젊은 층과 여성들은 시대 조류에 맞는왕세자의 개혁을 적극 지지한다.

젊은 리더쉽으로 국가 발전을 이룩한 두바이와 카타르는 젊은 사우디 국민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왕세자는 여성의 자동차 운전 허용과 극장과 축구 경기장의 출입 허용 그리고 자유관광특구 설정, 홍해 변의 미래 첨단 신도시 ‘네옴’ 프로젝트,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상장 등의 개혁과 개방 정책들을 계속 발표했다.

최근 유가가 많이 회복이 되었지만 저유가로 인한 사우디 정부의 재정 악화를 경험한 다음 왕세자는 석유에 의존하는 나라의 근본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국가 경제구조 개혁과 외국자본 유치도 시작했다.

한편 부패 척결의 명분으로 일부 왕실 인사들을 구금하고 압박하여 재산을 내놓도록 하는 등의 강력한 권력 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당연히 그는 권력에서 밀려난 왕족들 그리고 보수적인 이슬람 수니파 와하비즘 지지 세력과는 불편한 관계이다.

사우디는 역사적으로 1979년에 두 번의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이슬람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정’을 구축한 이란의 부상이고 다른 하나는 총기로 무장하고 메카의 이슬람사원을 점령하여 부패한 사우디 왕실 교체를 주장하며 끝까지 저항한 자생적인 세력을 목격하게 된 사실이었다.

이에 사우디는 그 동안 철저하게 사회 통제와 이슬람 원리주의 강화로 대응했고 그 결과 현재 가장 수구적인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불평,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복지 정책을 남발했다. 그 결과 사우디 국민들은 정부의 지원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힘든 일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도맡아서 해결했다.

사우디에서 땀 흘리는 사람은 축구 선수 밖에 없다는 자조의 말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왕세자의 드러난 정치적 입장은 국내적으로 부패 척결과 개혁, 개방이고, 국제적으론 이란에 대한 강경 대응이다.

예멘 내전 개입, 레바논 총리 사임, 카타르 봉쇄 그리고 이란과 단교 등이 모두 같은 국제 정치적 맥락이다. 그러나 태생부터 금수저인 왕세자의 위에서부터 개혁 정책에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많다.

예멘 전쟁, 카타르 단교, 과도한 국내 반대 세력 숙청, 자유 언론 탄압 그리고 무모한 경제 개발 계획 등 왕세자의 독선과 폭압적 행태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최근 터키에서 실종된 반정부 언론인 자밀카슈끄지도 그런 비판적인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단호하게 제거하는 것이 왕정국가 내에서 가능할 지는 몰라도 백주 대낮에 다른 나라에서 실행하는 것은 무모하다. 인권 문제로 캐나다 유학생들을 전원 귀국 조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과연 그는 ‘개혁군주’인가? 과대망상증 ‘폭군’인가? 거창한 개혁을 말하나 모든 것이 권력을 공고화 하기 위한 정치 게임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국제 관계에선 여러 번 행한 무리수들이 보인다. 사우디 왕세자의 행보에 중동과 세계의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선완 교수는
1981년 연세의대 입학하여 격동의 80년대를 대학에서 보내고 1987년 연세의대를 졸업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레지턴트를 마치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이후 건양대학병원 신설 초기부터 10년 간 근무한 후 인천성모병원을 거쳐 가톨릭관동대학 국제성모병원 개원에 크게 기여했다. 지역사회 정신보건과 중독정신의학이 그의 전공 분야이다. 최근 특이하게 2년 간 아랍에미레이트에서 한국 의료의 해외 진출을 위해 애쓰다가 귀국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