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이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였던 북·미 간 공식 대화가 멈춰 있다.
금방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을 것으로 관측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최선희 북한 외무상 간 비핵화 실무협상은 소식이 없다. ‘비건-최선희’ 라인이 가동되지 않는 것은 북·미 간 이견 때문으로 보인다.
비건 특별대표는 지난 1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이고리 모르굴로프 아시아·태평양 지역 담당 외무차관을 만나 한반도 정세를 논의했다. 모르굴로프 외무차관은 지난 6일 최 부상과 회담한 바 있다. 비건 대표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지난 7일 4차 방북에 동행했다. 하지만 당시 최 부상이 러시아에 머물고 있어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비건 대표는 러시아에 이어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일정을 소화한다.
이상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연구위원은 1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북한 입장에서는 얻는 게 있어야 종전선언을 밀어붙이는데, 종전선언의 값이 지금 너무 떨어졌다”며 “미국이 종전선언을 주고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 등을 내놓기로 한 판이 바뀌어 버린 거 같다”고 분석했다.
문 대통령은 미국 방문 당시 보수성향 매체인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이 이뤄지면 유엔사의 지위가 흔들리거나 주한미군이 철수 압박을 받으리라는 의심도 일부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 “주한미군 주둔은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과 무관하게 한·미 동맹이 결정할 문제이고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동의하고 있다”며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심지어 남북이 통일된 후에도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종전선언에 난색을 표해온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종전선언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이 도리어 협상 판을 뒤흔든 것이다. 미국은 종전선언이 불가역적인 조치가 될까 우려해왔다.
북한은 비핵화 진전을 통해 체제 안전보장과 대북제재 완화라는 두 가지 방향의 상응조치를 원해왔다. 북한 입장에서는 체제 안전보장의 출발점인 종전선언이 ‘정치적 선언’이자 비불가역적인 성격으로 규정되면서, 더 이상 종전선언에 목을 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위원은 “지금 정확히 어떻게 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북·미 간) 서로 조건이 틀어진 부분이 있는 거 같다”며 “북한은 지금 종전선언만 가지고 안 되고 플러스알파를 요구하거나 다른 걸 갖고 오길 바라고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은 종전선언 안 받아도 된다고 하면서 제재 완화를 대신 받아야 한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종전선언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북한이 제재완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북한은 북·중·러 3자 차관급 협의를 통해 북한의 노력에 대한 ‘상응조치’가 중요하다는 데 3자의 견해가 일치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우군을 확보해 제재 완화에 힘을 싣겠다는 포석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한은 시간을 끌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려고 한다”며 “최근 한국 정부가 제재완화를 해야 한다고 얘기를 해주고 있어 상황을 관망하면서 여건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미국은 현재 북한에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양측의 대치가 길어지는 형국”이라고 덧붙였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북한은 계속 ‘스몰딜’보다 ‘빅딜’을 원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정상회담을 바랄 것”이라며 “사실 실무협상을 해도 특별히 비핵화와 관련해 이뤄질 게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폼페이오가 이미 방북 때 다 논의가 오고간 상황에서 실무선에서 큰 진전 있는 합의를 이루긴 쉽지 않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비건 특별대표와 최 부상 간 실무협상이 지연될수록 북·미 비핵화 협상의 동력이 떨어지고,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개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실무협상이 계속 열리지 않으면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도 늘어질 수 있다”며“비핵화 협상이 공전상태로 빠질 수 있다”고 관측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