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저주받은 자들이 사는 곳. 이게 나한테 내려진 형벌인거야. 짐승 보다 못한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아름다움을 삼켜버리고는..(중략)순수함을 씹어 삼켜서 똥으로 만들어 버리는 짓거리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형벌”
돼지우리에서 숨어 지내며 40년 동안 분뇨를 뒤집어쓰고 살아온 러시아 탈영병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 ‘돼지우리’(A place with the pigs)<연출 손진책·작 아놀드 후가드>에서 살아온 극중 인물 파벨(박완규 분)의 대사다.
죽음의 순번을 기다리며 정육점으로 향하는 돼지처럼, 희망과 자유는 고립된 채 돼지우리에서 살아가는 탈영병 파벨의 인생을 비추는 작품이다. 국내 무대에서는 <아일랜드> 작가로 익숙한 아놀드 후가드의 국내 초연 작품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획한 ‘베스트 앤 퍼스트’(BEST & FIRST)의 연극분야 4개 작품 중 (X, 아라비안 나이트, 크리스천스, 돼지우리) 한 작품으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9월8일~22일) 무대에서 공연됐다.
자유의 갈망과 전쟁의 무덤
파벨 이야기는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해 탈영한 군인을 모티브로 쓰여졌다.
고통스러운 냉혹한 추위, 배고픔으로 갈라지고 터지는 배를 움켜쥐고 전선을 누벼야 했던 파벨은 “천국에도 지옥에도 승리의 깃발을 꽃을 곳은 없어. 무덤 속에선 그 어떤 명분도 존재하지 않으니까(중략) 집으로 돌아가 파벨”
어머니의 체온이 흐르는 슬리퍼에 대한 기억과 아내의 온기를 죽음과 바꿀 수 없었던 주인공은 1943년 한겨울 탈영한 채 40년을 피부를 찌르는 분뇨의 악취에서 숨어 살아가는 것을 신의 형벌로 생각하며 살았다.
주인의 폭력도, 등짝을 후려치는 잔인한 손길도, 코 속으로 흡입하는 먹이도 죽음을 달리는 악마의 손 짓 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돼지는 한 인간의 구원으로 자유의 길목으로 나설 때까지 축사(畜舍)는 죽음의 공간이 된다. 연극 돼지우리는 인간 존엄성은 상실되고 자유와 인간의 체온을 갈망하며 돼지우리에서 살아가는 탈영병 파벨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대는 돼지의 분뇨가 느껴질 정도다. 허름한 목재의 돼지축사 틈으로 악취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배치했다. 조명은 외부세계와 철저하게 차단된 채 살아가는 인간을 투사하고 무대를 움직이는 빛은 파벨의 운영과 포개진다. 비좁은 축사에서 수 마리의 돼지들이 ‘꽥꽥’ 거리며 뛰쳐나올 것 같은 전경을 마주 하면 파벨(박완규 분)은 탈영을 한지 10년하고 두 달 6일째 되는 전쟁영웅을 기억하는 승전기념식에서 탈영사실을 고백하기 위해 연설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을 수차례 반복 연습할 때 쯤, 아내(고수희 분)은 갇혀 지낸 시간을 주와 월단위로 빼곡하게 표시를 해둔 돼지우리로 들어선다.
파벨은 “동지여러분 파벨 이바노비치 나브로스키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있습니다.(중략) 이 사람은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연설문을 수정하며 자신은 전쟁영웅이 아니라 전선을 도망친 탈영병이며 돼지우리에서 숨어 지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군법 판결을 달게 받겠다고 결심한다.
아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를 지켜 주실 거야”라고 하고 파벨은 “하느님 따위는 이 시궁창 같은 돼지우리에 살아가는 날 구원해 주질 않아”라고 말하며 절망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세월을 표시해 두는 일과 파리를 잡거나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 등짝을 내리치는 일이다. 탈영병사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죽음의 공포는 몇 발자국만 디디면 자유의 문을 열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된 채 갇혀 지내게 된다. 돼지우리는 여전히 현실세계에서 떠돌고 있는 공간이며, 삶의 주변이다. 외부세계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은 탈영병을 겨누는 죽음(총살)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다. 전선(戰線)의 기억은 탈영을 하다 눈밭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간 병사의 시체더미로 멈추어져 있다.
아내에게 꺼내놓는 그의 과거는 아버지의 폭력과 학대에 자라났다. 폭력의 잔혹성에 저항할 수 없었던 상실된 자아는 용기를 거세당한 채 그를 숨게 만들었고 아버지의 폭력이 날아 올 때 마다 두려움에 떨었던 소년 파벨은 숨을 장소를 찾아야 했다.
“난 어린시절부터 숨을 장소는 기가 막히게 찾아내지”하며 능청스럽게 고백의 포문을 열면서 노트에 빼곡 적어 놓은 67번째 장소를 말하는 장면에서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돼지우리는 그가 숨을 곳을 찾아낸 68번째 장소다. 소년시절 아버지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기억은 아버지 폭력과 어머니의 체온으로 갈라져 있다.
전선에서 날아오는 폭격과 살갗을 뚫는 죽음의 전쟁터는 아버지의 손이었으며 그것은 어머니의 체온이 흐르는 전류의 장소로 숨어야 하는 것이다. 폭력으로 손상된 자아는 저항할 수 없는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라났다. 파벨에게 저항은 도피였으며, 포탄이 날아드는 죽음의 전선은 아버지의 폭력처럼 대항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휩싸인 죽음의 능선이었다. 엄마가 손수 만들어 주신 슬리퍼의 온기만이 살아 숨 쉬는 파벨의 내면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 폭력을 피해 무의식적으로 숨을 공간으로 도피한 것처럼 의도하지 않는 탈영을 하게 되고 진실을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한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피바람이 몰아치는 시체더미에 승리의 깃발을 꽂아야 하는 전선은 승자도 패배자도 공존할 수 없는 죽음의 깃발만 펄럭거리는 세계다.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 황폐화되고 탈영한 병사를 총살하는 잔혹한 승리의 함성만 외치는 전선이다. 죽음의 순번을 기다리며 살갗이 폭력으로 터지고 핏물이 피부가 되도 폭력에 순종함으로써 자유는 죽음으로 고립되어 있는 돼지들의 운명과 파벨 인생이 동일화된 공간으로 포개진다. 노장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장면은 두 배우의 연기로 웃고 장면으로 반사되는 인간의 내면과 파벨의 인생사(史)에 애잔함과 인간의 연민을 담아낸다.
구도적 체험과 구원
파벨은 위대한 승전 기념일 날 군복을 갖춰 입고 탈영사실을 고백하면 진실을 믿어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10년 만에 꺼내 입는다. 군복은 쥐들이 갉아먹어 파벨은 탈영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은 상실된다. 아내에게 국가를 위해 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전쟁영웅 파벨이 호명되는 순간에 헌화하고 남편 죽음을 슬퍼하는 연기를 하고 오라고 하며 파벨은 돼지우리에서 박제된 군인으로 40년을 자유와 차단된다. 전쟁의 전선은 참전국가의 승리만을 위한 전투다. 인간의 존엄성은 파괴된 채 국가의 승리의 깃발을 죽음의 무덤위에 세울 때까지 싸워야 한다. 배고픔은 죽음으로 달래고, 전쟁의 승리도 죽음의 두려움을 품고 사는 신의 형벌이다.
탈영자의 생존은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막혀 있던 용기를 토해내 자유의 공기를 느낄 수 없는 인간은 배설물을 코 속으로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돼지 같은 존재다. 악취가 진동하는 지옥 같은 돼지축사로 날아든 고귀한 ‘나비’의 구원과 자유의 펄럭임은 생존을 위한 먹이가 될 뿐이다. 구원의 날개를 삼켜버린 돼지우리로 뛰어 들어가 “살인자”라고 외치며 칼로 돼지를 죽이고 흘러내리는 돼지핏물은 이 사회에 마지막 소외계층이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흘리는 영혼으로 피(血)로 느끼는 깨달음은 구도적(求道的 체험이다. 이 과정을 통해 두려움과 내면의 공포를 거세하고 비로소 파벨은 자신과 처지가 동일한 돼지를 구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돼지 여물통으로 뛰어 들어간 파벨을 향해 남편의 살갗을 후려치며 우리 밖으로 나온 알몸의 파벨을 붙잡고 우는 장면은 인간의 숭고한 전율을 느끼게 하고, 아내의 구원적 숭고함은 내면의 살결을 파고들며 ‘인간’이라는 구원의 묵직한 결을 도려낸다. 남편 파벨이 전쟁에 나가 탈영한 채로 돌아와 돼지우리에서 40년 동안 갇혀 지내도 헌신적으로 돌본 것은 아내다. 파벨이 죽음의 순번만을 기다리는 돼지와 고립된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시선과 온기다.
늦은 밤 파벨은 여장을 하고 30년 만에 아내와 몰래 돼지우리를 빠져 나와 마을로 자유의 공기를 쐬러 탈출을 한다. 무대는 고립과 악취가 풍기는 돼지우리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가슴으로 닿을 것 같은 별, 하늘, 자유의 공기로 채워 넣는 마을풍경으로 무대가 회전되면서 파벨은 걷고 또 걸으며 “이제는 돼지우리로 돌아가지 않을 꺼야”라며 마을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희곡을 무대로 뚫어낸다. 연출은 이 장면에 승부수를 던졌고 공간을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노련한 연출과 텍스트를 무대로 올려놓는 날카로운 시선은 명확했다. 별들이 쏟아 질 것만 같은 우화로 아름답게 그려졌고 자유의 숨결이 파장을 일으키는 무대의 거대함은 진동이 컸다.
파벨은 마지막 장면에서 “저 불쌍한 동물들은 너한테 당할 만큼 당했어. 그러니까 파벨, 제들을 이제 그만 보내주는 게 어때?”라며 우리 속에 갇혀 있는 돼지들을 풀어놓는다. 죽음을 기다리는 돼지들의 구원은 인간의 구원이다. 자유는 용기가 있는 인간만이 두려움과 공포를 전복시켜 자유의 길가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다. 파벨이 자수할 수 있는 용기와 돼지들을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데는 40년 세월이 걸렸다. 낙타가 짊어진 거대한 무개에 마지막 ‘용기’라는 지푸라기를 올려놓음으로써 악취의 세상을 구원하게 된다.
<박완규>와 <고수희> 그리고 손진책 연출
2인극을 대극장 무대애서 채운 것은 노장 연출의 시선과 두 배우의 연기다. 고수희는 남편 파벨이 무너져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자유를 탈환하는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인물의 심리와 애잔한 내면을 실타래로 엮었다. 두 사람이 표현해 내는 인물내면의 심리와 박완규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더해져 장면은 때로는 애잔한 연민의 파장을 일으켰다. 한 인간의 고뇌와 절망의 고리를 끊고 무대를 자유의 공기로 담아 낼 때까지 두 사람 연기로 110분을 채워냈다. 두려움과 절망에도 자유를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의 희비극성을 박완규 연기스타일로 인물의 여백을 채우고 표현해냈다.
이 작품을 끌고 나가는 힘은 배우의 노련함, 탄탄한 희곡의 구성, 돼지우리의 악취를 진동시키는 작가의 우화적 풍자도 유별나지만 대사로 촘촘하게 채워진 두 사람의 삶을 정직하게 무대로 그려내고 장면을 배치하는 손진책 연출 무게가 흐르는 무대였다. 작품을 보기 전에는 “2인극 돼지우리 공연을 왜 대극장으로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공연장 무대를 채우고 덜어내며 노장의 미장센과 두 배우의 연기로만 희곡을 그려내는 힘은 컸다.
특히 노장 손진책 연출이 장면을 무대로 배치해 내는 미학적 미장센은 아름다웠다. 파벨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용기를 통해 자유세계로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세 번의 체험을 통해서다. 악취가 날아드는 공간에 고귀한 나비가 마치 살아 있는 듯 돼지우리의 습함을 빨아 당긴다. 한 인간의 영혼을 치유 할 수 있는 공기로 감돌게 하고, 나비를 입속으로 빨아 당긴 돼지들을 향해 막대기로 돼지등짝의 살갗을 후려치며 피부에 박힌 돼지의 핏물이 인간의 영혼에서 흐르는 핏물로 느끼는 장면과 파벨이 돼지우리로 달려 들어가 폭력과 죽음을 체험하고 인간의 숭고함을 담아내는 두 사람의 몸부림은 전류가 흐른다. 별들이 두 사람을 따라가며 별빛에서 내려쬐는 자유의 온기는 강렬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은 40년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 고뇌하는 파벨의 연기가 시간의 속도를 멈추게 했으며 인간의 실존과 치열하게 싸우는 내면의 연기는 박완규의 능청스러움으로만 희석되어 아쉬웠다. 마지막 장면에서 돼지가 자유의 세계로 빠져나가는 장면도 돼지들의 소리로만 뒤섞여진 채로 상상을 자극해 자유의 숭고함이 대사로만 전달된 것 같았다.
극이 마지막 장면을 향 할 때 속으로 “어, 정말 돼지들이 한 두 마리 나올 것 같은데”라는 생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다. 또한 문화예술위원회가 초연작품을 개발하고 선정해 무대화 하겠다는 기획으로 올린 ‘베스트 앤 퍼스트’가 작품은 개발하고 관객개발에는 더딘 것 같다. 좋은 연극작품이 극장을 찾은 소수의 관객만을 향해서 울리는 기획은 소리가 공허가게 들릴 수 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