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이렇게 큰 관심을 가져주시다니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제가 지금 ‘신기하다’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데…(웃음). 요즘 정말 신기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내 이런 식이었다. 1시간 남짓한 인터뷰에서 그는 “신기하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얼굴에는 선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 속에서의 날카로운 카리스마는 얼마간 지워진 뒤였다. 배우 윤주만(37)을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방송을 보면 늘 아쉬움이 남았어요. ‘좀 더 고민했어야 하는데 부족했나’ 싶은 적이 많았죠. 그럼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끝나고 나니 굉장히 허전하고 먹먹하네요. 보통 작품을 마치면 시원섭섭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극 중 윤주만은 일본 낭인 유죠 역으로 매 순간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어릴 적 가족을 잃고 일본으로 건너가 무신회 낭인으로 살아온 구동매(유연석)의 충직한 오른팔. 단 한 명의 ‘오야붕’만을 섬기는 그의 의리는 비정한 시대를 비추는 한줄기 빛과 같았다.
제작사 화앤담픽처스와의 오랜 인연이 ‘미스터 션샤인’ 출연으로 이어졌다. 윤주만은 김은숙 작가의 전작인 ‘시크릿 가든’(SBS·2010~2011) ‘신사의 품격’(SBS·2012) ‘도깨비’(tvN·2016~2017)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눈도장을 찍었다. 캐릭터를 대하는 그의 성실함에 이응복 감독 또한 남다른 신뢰를 보냈다.
“제가 ‘도깨비’에서 지은탁(김고은)을 따라다니는 사채업자로 짧게 나왔어요. 은탁이 이모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2인조로 연기한 배우가 ‘산 속에 가서 묻자’는 대사를 할 때 제가 모종삽을 하나 준비해갔죠. 이응복 감독님이 되게 좋아해주셨어요.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예뻐 보이셨나 봐요.”
‘미스터 션샤인’의 유죠 캐릭터 역시 탄탄하게 준비해 나갔다. 동매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을 조선인이라는 전사(前史)를 쌓는 건 기본. 일찍부터 일본어와 액션 연습에 몰두했다. 유튜브에서 일본 검술을 다룬 영상을 찾아보고 사무라이 소재의 영화들도 섭렵했다. 검을 다루는 자세를 능숙하게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날렵한 이미지를 위해 촬영 전 몸무게 10㎏을 감량했다. 엔딩신을 앞두고는 더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다. 일본에서 본국 낭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채 조선으로 실려와 오야붕 앞에 버려지는 바로 그 장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피로 범벅이 된 유죠와 그를 바라보며 분노하는 동매의 모습은 강렬한 여운을 남겼더랬다.
유연석과의 호흡은 매 회 빛났다. 윤주만은 “(유)연석이와는 ‘구가의 서’(MBC·2013) 때 처음 만났다. 당시에는 함께하는 신이 많지 않았던 터라 이번에 많이 친해졌다. 연석이도 저에게 ‘(유죠가) 형이라서 다행’이라고 얘기해주더라. 일단 우리는 개그코드가 잘 맞는 편이다. 아재개그를 좋아한다”고 웃었다.
이어 “심각한 장면을 찍고 나서도 ‘컷’만 되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속 깊은 얘기도 많이 나누곤 했다. 연석이도 조·단역 시절의 서러움을 모르지 않아서인지 현장에서 동료 배우들을 두루두루 잘 챙기더라. 연석이가 워낙 인성이 좋다. 정말 착하다. 게다가 밥값도 잘 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유죠는 짧은 등장에도 매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날렵한 몸놀림과 중저음의 목소리가 캐릭터에 무게감을 더했다. 윤주만은 “대본상에 큰 임팩트가 있거나 대사가 많은 역할이 아니었는데 관심을 가져주시는 게 신기하다”며 “제가 잘했다기보다 좋은 글을 써주신 김은숙 작가님과 멋지게 연출해주신 이응복 감독님 덕분인 것 같다”고 했다.
윤주만은 망설임 없이 ‘미스터 션샤인’을 자신의 인생작으로 꼽았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얼마 전에 와이프와 바람을 쐬러 강릉에 다녀왔는데 몇몇 분들이 웅성웅성하며 저를 알아보시더라. 사인도 해드리고 함께 사진도 찍어드렸다. 정말 신기했다”고 미소를 지었다.
‘미스터 션샤인’ 첫 방송을 앞두고 결혼 소식이 전해졌을 때 ‘윤주만’ 이름 석 자는 종일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장식했다. 당시 지인들의 연락을 받고 ‘이게 무슨 일인가’ 벙쪘다는 그다. “댓글을 다 읽어봤었는데 ‘듣보잡’이라는 얘기가 가장 많더라고요(웃음). 저는 그것도 되게 재미있었어요. 당연한 반응이니까요.”
윤주만은 “지금의 상황을 맘껏 즐기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런 관심은 순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미스터 션샤인’을 보셨던 분들이 저를 잊지 않으시도록 최대한 공백을 줄여야 할 것 같다. 다음 작품에서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털어놨다.
연예계에 발을 디딘 건 18년 전이었다. 2000년 길거리 캐스팅이 돼 잡지 모델 일을 했다. 군대에 다녀오고 2004년부터 소속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정말 초짜였죠.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였어요. 틀 안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시크릿 가든’을 계기로 연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윤주만은 “수입이 불안정한 상태로 마냥 배우를 하겠다고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특히 서른 즈음에 번듯한 직장이 없으니 주변 눈치를 보게 되더라.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 미래가 불투명하게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연기를 계속해 온 건 “너무 하고 싶어서”라고 그는 얘기했다. “현장이 너무 좋아요. 현장에 있을 때 내가 숨 쉬는 것 같아요. 만약 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1만% 후회할 것 같았어요. 다른 친구도 똑같이 얘기하더라고요. 후회할 바에는 계속 하라고.”
윤주만은 지금도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 고맙게도 촬영 스케줄이 있을 때는 양해를 해준다고 한다. “20대 때 치열하게 살지 못해서 지금 더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윤주만은 “내 모토가 ‘놀면 뭐해’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뭐라도 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이라고 했다.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역시 아내다. 7년 연애 끝에 지난 7월 7일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은 달콤한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지칠 때는 와이프랑 한 번씩 여행을 가요. 그렇게 힐링을 하는 것 같아요. 조금 닭살스러울 수 있지만, 와이프를 보면 피로가 싹 풀리더라고요(웃음).”
차기작은 이미 정해졌다. ‘여우각시별’(SBS)에 출연하게 됐다. 그렇게 또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다. “저는 그냥 편안한 배우로 남고 싶습니다. 어느 작품에 어떤 역으로 나오더라도 ‘윤주만’ 하면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드렸으면 해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