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이다. 서해직항로를 통해 평양을 방문했다. 기자단은 가슴 왼편에 태극기 뱃지를 달았다. 북측 수행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이 들어간 뱃지를 부착하고 있었다. “그 뱃지가 뭐냐”고 물었다. 수행원들은 팔을 들어 기자를 때리려 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최고 존엄’을 건드렸다는 이유에서였다. 1주일 체류 기간 중 개마고원을 거쳐 백두산에 오르는 행운을 잡았다. 천지 앞에 섰다. 뭉클함이 느껴졌다. 민족과 통일, 그리고 태극기의 무게가 다가왔다. 그 뒤 이어진 북한 방문에서도 기자 가슴 왼편엔 태극기 뱃지가 달려 있었다.
1936년 8월 9일 민족의 영웅 손기정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결승선을 1위로 통과했다. 우승 단상에 오른 그는 고개를 숙이며 침울해했다. 월계수로 가슴을 가렸다. 그에 가슴엔 일장기가 달려 있었다. 그 뒤 이길용 기자 등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그해 8월 13일자 신문에 내보냈다. 그 유명한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한 체육기자의 담대함이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발 더나아가 태극기를 단 손기정의 사진을 내보내고 싶지 않았을까.
태극기가 특정 정치 집단의 상징으로 사용되면서 의미가 많이 퇴색하긴 했다. 그러나 그 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특히 운동선수들에게 태극마크를 단다는 것은 가장 큰 영광 중 하나일 것이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대표팀 수장 선동열 감독은 아시안게임 기간 가슴엔 영문으로 ‘KOREA’, 그리고 왼쪽 상단엔 태극기가 부착된 유니폼을 항상 입었다. 그리고 지난 4일 기자회견에서 “저 선동열과 국가대표 감독으로서의 명예 또한 존중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되었다”며 “스포츠 행정가가 아닌 대표팀 감독이 국감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마지막이 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국가대표 감독으로서의 명예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스포츠에 정치가 개입해선 안 된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라 아시안게임을 병역 면탈의 수단으로 악용해온 관행이다.
선 감독은 오직 ‘승리’를 위해 오지환을 뽑았다고 했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소통하지 않았다. 그런 사이 구단의 병역 미필자 끼워넣기 관행은 계속된 것이다.
이번 사안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국회에 나가 말할 사안이 아니다. 나가더라도 민간인 신분으로 가는 게 야구계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선택이다. 선례를 남겨선 안 되는 것이다. 선 감독이 태극기의 무게를 지금이라도 느낀다면 말이다.
김영석 기자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