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마찬가지로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재판부는 1심과 같이 신 회장의 뇌물공여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신 회장 측의 ‘강요의 피해자’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서울고법 형사8부(부장판사 강승준)은 이날 신 회장의 국정농단 및 롯데 총수일가 경영비리 사건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신 회장을 석방했다. 이는 이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선고받은 것과 똑같은 형이다.
신 회장은 2015년 11월 면세점 특허 재취득에 탈락하자 이듬해 3월 청와대 안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독대하며 면세점 특허를 대가로 최순실씨가 실질 지배하는 K스포츠재단에 뇌물 70억원을 추가 지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앞서 신 회장은 롯데 총수 일가의 경영비리 혐의로도 별도의 재판을 받았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배우자 서미경씨과 그의 딸에게 508억원의 공짜급여를 지급한 혐의, 서씨 모녀와 누나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게 롯데시네마 매점 운영권을 몰아줘 774억원의 손해를 회사에 끼친 혐의, 자본잠식상태에 있는 롯데피에스넷 유상증자를 위해 계열사 자본을 끌어 쓴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롯데 경영비리 사건 1심 재판부는 신 회장에게 징역 1년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구속 위기를 겨우 넘겼지만 국정농단 사건 1심 재판부가 지난 2월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 됐다. 1심에서는 두 개의 재판부에서 분리해 심리했지만 항소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병합돼 이날은 한 개의 형만 선고됐다.
이날 신 회장의 석방 여부는 세간의 관심이었다. 이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풀려난 것과 같이 신 회장도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수 있을지가 주목됐다.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실질 지배한 K스포츠재단의 하남 체육시설 건립 사업에 70억원을 추가 지원한 혐의가 뇌물로 인정될지가 쟁점이었다. 이 부회장의 경우 항소심에서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라는 존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부정청탁 대상을 요건으로 하는 제3자 뇌물죄가 깨졌고,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으로 감형됐다. 하지만 신 회장 1심 재판부는 ‘롯데 월드타워 면세점 특허 재취득’ 이라는 청탁 대상이 증명됐다고 판단했다. 이 부회장과 신 회장의 운명을 가른 것은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충분히 입증됐는지 여부였다.
신 회장 항소심 재판부도 부정청탁의 대상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다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먼저 적극적으로 K스포츠재단에 추가 출연을 요청한 사실을 들어 “향후 기업활동에 있어 불이익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통령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봤다.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 안가에서 이뤄진 독대에서 먼저 K스포츠재단 추가 출연을 요구했다는 것은 항소심에서 안종범 전 경제수석이 진술을 번복하면서 드러난 사실이다. 안 전 수석은 항소심 과정에서 “신 회장에게 먼저 ‘대통령이 만나길 원한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증언을 내놨다. 또 독대에 앞서 가진 오찬자리에서 “면세점 재취득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이러한 안 전 수석의 진술이 신 회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재판부는 이러한 진술을 형에 반영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뇌물공여 범행은 대통령이 먼저 적극적으로 신 회장에게 금원 지원을 요구한 것”이라며 “국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원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수자의 강요행위로 인해 의사결정의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 뇌물공여의 책임을 엄히 묻는건 적절하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이어 “강요죄의 피해자이면서 뇌물의 공여자라는 지위가 동시에 인정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도 비슷한 맥락의 판단을 내놓은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대한민국의 최고 정치권력자인 박 전 대통령이 삼성 그룹의 경영진
을 겁박한 것으로 전형적인 정경유착을 이 사건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신 회장과 이 부회장 모두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강요의 피해자’라는 논리다.
롯데 경영비리 혐의에 대해서는 1심과 대부분 판단을 같이 했다. 롯데시네마 매점 운영권에 영업이익을 몰아줬다는 일부 배임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다만 총수 일가에 공짜 급여를 지급했다는 횡령 혐의에 대해서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지시에 따라 급여가 지급되는 것을 용인했을지언정 공모했다고 볼 수는 없다”며 1심과 달리 무죄로 판단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