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과 2018년, 미국 대법관 청문회는 어떻게 달랐나

입력 2018-09-28 18:52
1991년 10월 11일 토마스 클래런스 연방 대법과 후보자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애니타 힐 교수. AP뉴시스

27일(현지시간) 미국 상원 법사위에서 진행된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 청문회는 1991년 10월 11일 클라렌스 토머스 연방대법관 후보자 청문회를 떠올리게 한다. 두 청문회가 후보자의 성폭력 의혹과 관련해 증인이 출석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캐버노 후보자에게 고교 시절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고 폭로한 크리스틴 포드 교수, 1991년엔 상사였던 토마스 후보자에게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한 것이 언론에 알려진 애니타 힐 교수가 증언대에 섰다.

힐 교수는 1991년 토마스 후보자의 성추행 관련 정보를 다른 FBI 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되면서 청문회에 출석했다. 그는 교육부와 고용평등위원회에서 일하던 1981~1983년 상사였던 토마스 후보자가 자신을 성추행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직장 내 성추행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았을 때인데다 모두 백인 남성 의원으로 구성된 청문회는 힐 교수를 몰아부쳤다. 공화당 의원들은 다른 여성 피해자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의 기획에 따라 힐 교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은 힐 교수에게 “당신은 모든 사람이 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색정광”이라는 모욕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민주당 의원들조차도 공화당 의원들의 왜곡된 질문으로 힐 교수를 보호하기는 커명 힐 교수에게 성추행 장면에 대한 묘사를 반복적으로 하게 만드는 우를 범했다.

26일(현지시간) 애니타 힐 교수의 유타대학 강의를 앞두고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지지를 표명하며 기다리고 있다. AP뉴시스

힐 교수의 증언에 대해 토마스 후보자는 인종차별 카드를 들고 나왔다. 토마스 후보자는 최초의 흑인 대법관 서굿 마셜의 퇴임 후 임명된 두 번째 흑인 대법관 후보자였다(다만 진보 성향이었던 마셜 대법관과 달리 토마스 후보자는 보수 성향이었다). 미국에서 예민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백인 남성 의원들은 입을 다물었고, 상원 투표에서 찬성 52 대 반대 48로 임명이 가결됐다.

비록 토마스 후보자의 대법관 임명을 막지는 못했지만 힐 교수의 증언은 미국에서 직장 내 성추행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분노한 여성들이 앞다퉈 정치에 투신했다. 청문회 다음 해인 1992년 선거에서 연방 하원 여성 의원 수가 기존 28명에서 47명으로, 상원은 2명에서 6명으로 늘어 사상 최대 기록을 세웠다. 미국 정치사에서 ‘여성의 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27일(현지시간) 브렛 캐버노 연방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크리스틴 포드 교수. AP뉴시스

1991년 청문회에서 27년이 지난 올해 청문회에서 포드 교수는 고교 시절 캐버노 후보자의 성폭행 미수를 증언했다. 포드 교수는 원래 지난 7월에 법사위 민주당 간사인 다이앤 파이스타인 의원에게 캐버노 사건을 편지로 알렸었다. 파인스타인 의원은 전략상 청문회 직전에 터뜨리기 위해 편지를 감춰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잡지 뉴요커가 이달 초 이 내용을 익명으로 일차 보도한 데 이어 16일 워싱턴포스트가 실명 기사로 내보내면서 문제가 확산됐다. 포드 교수는 청문회 증언에 앞서 캐버노 후보자의 성폭행 미수에 대한 FBI의 조사를 요청했지만 공화당이 전력으로 막았다.

1992년 선거에서 대패해 민주당에 정권까지 내줬던 악몽을 기억하는 공화당은 이번 청문회에 현직 성범죄 전담 여성 검사 레이철 미첼에게 포드 교수에 대한 질의를 일임하기로 했다. 여성 의원이 4명 포함된 민주당과 달리 공화당은 전원 남성이라 자칫 ‘캐버노 구하기’에 나섰다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망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실제로 1991년 혼자 외롭게 싸워야 했던 힐 교수와 달리 포드 교수는 원군이 많다. 이미 캐버노 후보자의 성폭력을 고발한 또다른 피해자들이 실명을 드러내며 포드 교수의 증언에 힘을 실어줬다. 무엇보다 지난해 ‘미투 운동’의 여파가 여전히 미국을 강타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드 교수에 대한 전국적인 지지가 잇따르고 있다. 이날 청문회가 있던 의사당 건물 밖에는 수백여명의 여성들이 몰려와 ‘캐버노 지명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27일(현지시간) 브렛 캐버노 연방 대법관 청문회가 열린 의사당 밖에는 여성들이 몰려와 인준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AP뉴시스

게다가 청문회 이후 언론의 평가도 대체로 캐버노 후보자보다 포드 교수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왜 캐버노는 믿을 수 없고 포드는 믿을만 했는가’란 제목의 사설에서 “포드는 차분하고 위엄이 있었던 반면 캐버노는 적대적이고 불안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보수 성향인 폭스뉴스의 진행자 크리스 월러스도 “포드의 증언을 듣고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라며 “이번 청문회는 공화당에 재앙”이라고 평가했다.

공화당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캐버노 후보자에 대한 인준 표결을 28일 강행할 예정이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서도 캐버노 후보자를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가 많은데다 FBI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인준을 중단해야 한다는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올해 중간선거에 역대 최다 여성 후보자들이 나선 상황에서 1991년의 악몽을 재현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