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병에 걸려 숨졌지만 공무상 재해로 인정받지 못한 고(故) 김범석 소방관의 부친이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을 게시했다. 그는 “발병 원인에 대한 입증의 책임을 유족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김 소방관의 아버지 정남씨는 21일 올린 청원에서 ‘이제는 손자에게 너의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소방관 아빠였다고 말하고 싶은 할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희귀병과 암으로 투병 중인 소방관들이 2번 상처 입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덧붙였다.
김 소방관은 8년간 재직하다 2014년 6월 갓 돌을 넘긴 아들과 아내를 남겨둔 채 31세의 나이로 숨졌다. 7개월간 그를 괴롭혔던 ‘혈관육종암’이 결국 생명을 앗아간 거였다. 이 병은 혈액에서 발생한 병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는 희귀병이다. 발병 원인은 불분명하다.
당시 공무원연금공단(공단)은 “직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며 순직유족보상을 거부했다. 김 소방관 아내는 2015년 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 유족 측은 “신체 건강했던 김 소방관이 화재현장의 유해물질과 업무상 스트레스로 병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공단과 같은 이유로 공무상 사망 불인정 판결을 내렸다.
2차 소송 변론은 지난 20일 서울고등법원 1별관에서 진행됐다. 정남씨는 “이날 호소문을 준비했지만 원고(김 소방관 아내)가 아니라서 읽지 못했다”고 청원글에서 밝혔다. 그는 “(아들이) 1021회의 출동 중 270회의 화재 출동, 751회의 일반 출동 때마다 주변의 위험에 맞서 생명을 구했다”며 “하지만 소방관 스스로가 현장의 유해성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2심 판결은 다음 달 25일 나온다.
현행법상 공무 중 질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당한 공무원이 공상(공무상 상해)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소방관의 경우 사고 위험이 높은 업무 환경이지만 일반 공무원과 같은 조건에서 심사받는다. 정남씨도 호소문에서 이 부분을 지적했다. 그는 “국가는 소방관에게 소위 위험직 공무원이란 명칭을 부여해 놓고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남씨는 “(아들이) ‘체력이 좋아야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으로 몸을 단련했다”며 “당연히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술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체력이 좋던 아들의 몸에 갑자기 이상 반응이 왔다. 아들은 이후 병상에 누워서도 동료들에게 연락해 현장에 출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전했다”고 말했다.
김 소방관은 숨지기 전 정남씨에게 “내 병이 인정받기 힘든 거 알지만 죽고 나면 소송이라도 해줘.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소방관 아빠로 기억되고 싶어”라는 부탁을 남겼다고 한다. 정남씨는 “이를 인정받기 위해 기약없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며 “하루빨리 손자에게 아버지가 병에 걸려 죽은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소방관으로서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